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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의그늘 김형욱 전 중정부장 실종살해 사건
게시물ID : history_96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ss989
추천 : 7
조회수 : 110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31 03:16:58

 

 

 

 

박정희에게 시궁창 물 끼얹은
김형욱의 무시무시한 증언
회유하려다 뒤통수 맞은 중정
김재규의 의미심장한 한마디
“그자는 혼 좀 나야겠습니다”

김재규는 이상열에게 시키고
이상열은 신현진에게 시켰다
신현진은 산 위 법당에 서면
끝없이 절을 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었다지만
살해장소는 끝내 숨겼다

 

 

 

1979년 10월16일 아침 <조선일보>는 1면에 3단짜리 크지 않은 기사로 “미국의 거주주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에 여행 중 1주일째 행방불명”이라고 보도했다. 김형욱, ‘날으는 돈가스’ ‘공포의 삼겹살’ 등의 별명을 얻을 만큼 박정희 집권 18년 중 3분의 1이 넘는 기간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를 위한 악역(이에 대해서는 <한겨레21>(‘돌대가리’로 박정희를 들이박다’

 

 

 

 

, 2005년 6월7일 제562호 참조)을 도맡았던 그였다. 유신 다음해인 1973년 슬그머니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1977년 6월 미국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의 세칭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와 박정희 정권에 불리한 증언을 쏟아냈다. 그 때문에 김형욱은 유신체제의 공공의 적 1호가 되어 반역자, 변절자, 쓰레기 등 온갖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1977년 말에는 그를 단죄하기 위해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1996년 헌재의 위헌 결정) 되기까지 했다. 그런 김형욱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갖가지 시나리오가 난무할 만큼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졌지만, 정작 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은 가족 이외에는 별로 없었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은 죽음, 파란만장했지만 참 슬픈 삶이었다.

박정희 여자문제까지 폭로할 작정이었나

 

 

 

 

 

김형욱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1976년 10월24일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달러를 뇌물로 제공했다고 폭로하면서부터였다.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시작된 직후인 11월 말 대외적으로는 주미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정보부의 미국활동조직 부책임자였던 김상근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상근은 과거 김형욱의 비서였으며, 망명 과정에서도 김형욱의 도움을 받았다. 박정희 밑에서 가장 좋은 관운을 자랑했다던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김상근의 망명으로 1976년 12월4일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신직수의 후임이 바로 김재규였다. 김재규의 첫번째 임무는 김형욱을 귀국시키는 일이었다. 1977년 1월17일자로 김재규는 김형욱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편지를 보내 귀국을 종용했다.

 

 

 

 

유신정권의 김형욱 귀국공작은 1977년 6월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뉴욕 타임스>가 김형욱과의 독점 인터뷰 내용을 대서특필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 기자회견에서 김형욱은 박동선을 활용한 공작에 대해 자세히 폭로하고, 박정희는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김형욱이 6월22일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나가 “박정희씨 개인에게 설사 인간적인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자가 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김형욱의 증언은 확실히 박정희에게 시궁창 물을 제대로 끼얹은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것임에 틀림없었으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증언을 마친 김형욱이 1977년 6월 말에 착수하여 실종되기 직전인 1979년 9월 말 완성할 때까지 몰두한 것은 회고록의 작성이었다. 김형욱은 청문회에서 박정희의 여자관계를 비롯하여 중요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고록에 더 주목했고

 

 

, 프레이저 의원은 김형욱이 자신이 아는 사실을 충분히 진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형욱이 미국으로 빼돌린 2천만달러 이상의 막대한 재산 문제를 치고 들어갔다. 1977년 7월1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2차 증언을 마친 김형욱은 7월15일 ‘국민과 역사 앞에 참회합니다’라는 제목의 특별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박정희씨를 인간적으로 비하시키는 개인적인 부덕을 강력 자제”해 왔다면서, 오랜 기간 정보기관의 책임자였던 자신은 “박정희씨에 대하여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이라고 유신정권을 협박했다.

 

 

 

 

박정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으로 있던 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네 미국 좀 다녀와야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윤일균이 준비되는 대로 가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아니야, 당장 가”라고 서둘렀다. 미국으로 달려간 윤일균은 권총을 탁자에 꺼내놓는 김형욱을 상대로 사흘 밤낮을 설득하여 복사지 2천장 분량의 방대한 회고록 원고를 건네받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는 미국돈 50만달러를 제공하고 김형욱의 여권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 회고록 출판을 중단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보낸 특사 중 7~8번째에 해당한다는 윤일균이 마침내 성과를 거둔 것이다.

대서양 상공 투척설에서 양계장 분쇄설까지

 

 

 

 

 

김형욱은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김형욱은 일본의 유명한 출판사인 고단샤(강담사)에서도 회고록 출간을 준비했는데, 한국 정부가 고단샤에 다른 이권을 주고 출판을 저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1979년 4월 ‘창’이라는 작은 출판사가 <권력과 음모>라는 제목으로 김형욱 회고록의 축약판을 내놓았다. 유신정권이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조갑제는 전 해군참모총장 이용운이 김재규와 김형욱 사이에서 회고록 출간을 저지하는 교섭을 담당했다고 쓰고 있다. 이용운은 1975년 1월 일본 <교도통신>과의 회견에서 6·25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는 인물이었다

 

 

 

 

. 김재규는 김형욱이 요구한 150만달러를 주고, 압류중인 김형욱의 국내 부동산을 풀어주고, 여권 문제도 해결해주는 대가로 이용운이 원본임을 확인한 원고를 건네받기로 했다고 한다. 이것이 1979년 9월의 일이었다. 김재규는 얼마 후 이용운에게 전화하여 김형욱의 여권을 뉴욕 총영사관에 맡겨 놓았으니 찾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이용운이 김형욱에게 이를 전하자 김형욱은 “뉴욕 총영사관은 치외법권 지대인데 내가 만약 여권을 찾으러 갔다가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라며 여권을 간부급 직원이 직접 가져다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전해들은 김재규는 지금까지 약속한 것을 다 취소하겠다고 전화통에다 신경질을 내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고 한다. “김형욱, 그자는 혼 좀 나야 하겠습니다.”

 

 

 

 

 

박정희가 죽기 20일 정도 앞서 김형욱은 죽었다. 다양한 설이 제기되었다. 크게는 ‘국내 압송 후 살해’설과 ‘프랑스 현지 살해’설로 대별되었다. 국내설에는 국내로 납치해오다 대서양 상공에서 바다로 떨어뜨렸다느니, 폐차장에서 압살했다느니, 청와대 지하 사격장에서 박정희가 직접 쏘아 죽였다는 주장이 있고, 프랑스 현지설로는 주프랑스대사관 지하실에서 살해했다, 살인청부업자가 살해하여 우아즈강에 수장했다, 파리 근교의 양계장에서 살해하여 시신을 닭모이 분쇄기로 처리했다(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의 방식!), 중앙정보부 요원이 파리 교외에서 살해했다 등등이 있었다. 돈을 노린 범죄라는 설도 있었고, 이북이 납치해갔다는 설도 있었고, 본인이 잠적했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었다.

 

 

 

2004년 11월 출범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김형욱 실종사건을 7대 우선규명 사건의 하나로 선정했다. 당시 국정원 쪽 간사를 맡았던 김만복 기조실장은 사건 해결을 자신했다.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에 의해 프랑스에서 연수중이던 중정요원에 의해 납치 살해당했다는 것은 정보부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김만복 실장은 그 연수생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이미 그들에 대한 설득 작업을 진행중이었다. 이들은 상당한 정도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관련자들이 사건 당시 그들에게 ‘과업’을 직접 부여한 프랑스 주재 중앙정보부 조직의 거점장인 전 프랑스 공사 이상열의 존재를 여전히 부담스러워했다는 점이었다.

 

 

 

 

이상열은 김재규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김재규가 3사단 부사단장을 지낼 때 이상열이 부관이었고,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을 지낼 때 보안사에 근무했고,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는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다.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중동 건설에 매진할 때 이상열은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의 참사관과 공사를 지냈다.

 

 

 

 

 이상열의 인생에서 전기가 된 것은 1965년의 원충연 반혁명 사건을 고발한 일이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군부 내에서 수많은 ‘반혁명 사건’이 발생했는데, 모두 박정희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고 오직 원충연 사건만이 실제 병력을 동원하여 박정희를 제거하려 한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원충연 등의 재판에 이상열이 증인으로 나오자 피고인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놈 배신자야!” “개××야” 하는 등 욕설을 퍼부어 공판장이 소란해졌다고 한다.

 

 

1979년 9월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프랑스에 연수를 나가 있던 5~6명의 유학생을 자택으로 초대했다. 이상열은 “요즘 젊은 사람들은 패기도 없고 마음에 안 든다”고 이들을 자극하면서 파리 주재 북한통상대표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오라고 지시했다

 

 

 

. 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앞두고 있던 신현진(가명)은 “우리 같은 졸따구들이야 그렇더라도 공사님들급은 패기가 없으면 국가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가볍게 들이받았지만, 북한통상대표부에 대해서는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신현진의 담대함과 업무추진력을 눈여겨본 탓인지 이상열은 신현진을 따로 불러 특별히 부여할 임무가 하나 있는데 “일단 자네한테 임무를 전달하고 나면 자네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일은 자네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분위기를 잡았다. 이상열은 “부장님한테 (김형욱 살해) 지시를 받았는데 자네가 적극적으로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임무를 부여했고, 신현진은 김형욱을 처치하겠다는 뜻으로 “보내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신현진은 “평소 기질이 맞아 친근하게 지내던 후배 연수생 이만수(가명)”를 보조역할로 지목했다. 신현진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와의 면담에서 김형욱 살해의 실행은 어학연수 과정에서 알게 된 제3국인(동유럽) 친구 2명에게 10만달러를 주고 실행하도록 시켰다고 진술했다.

 

 

 

 

김형욱이 파리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인 것은 1979년 10월7일이었다. 이상열은 그날 오후 신현진을 급히 불러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와서 곧 만나기로 했으니 오늘 처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신현진은 이상열을 조수석에 태우고 이상열의 관용차(푸조 604)를 직접 운전했다.

 

 

 

 신현진은 이만수 등을 불러 10만달러가 든 돈가방을 가지고 다른 곳에서 대기하게 한 후 제3국인 친구 2명을 뒷좌석에 태우고 김형욱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이상열은 김형욱에게 운전하는 사람을 자신이 아끼는 중정 연수생이고, 뒷좌석의 두 사람은 돈을 빌려주기로 한 사람이니 가까운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하고 자신은 저녁 약속이 있다면서 현장을 이탈했다. 김형욱은 이상열 대신 조수석에 올랐고, 차는 개선문 앞 로터리를 우측으로 돌아 시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 어두워진 파리 시내를 벗어나 달렸다

 

 

 

. 신현진에 따르면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제3국인 친구가 갑자기 김형욱의 머리 뒷부분을 가격하여 실신하게 한 후, 파리 교외 인적 드문 작은 숲에서 제3국인 친구 2명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실신해 있는 김형욱의 양쪽 팔을 끼고 차에서 끌어내려 도로 우측 숲 속으로 끌고 내려간 후 30분쯤 지나서 돌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신현진에게 김형욱의 소지품을 바바리코트에 싸서 전해주면서 김형욱을 도로에서 약 50m 떨어진 장소에서 머리에 신현진으로부터 받은 소음권총을 쏘아 죽이고 땅을 깊이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 있는 낙엽으로 덮어 버렸다고 말했다.

 

 

 

 

 

 

연수생들이 받은 300만원짜리 봉투의 의미

 

 

 

 

신현진은 10월10일, 이만수는 10월11일 각각 귀국했다. 신현진은 3년 반의 연수가 끝나 귀국할 때가 되었지만, 이만수는 2년 계획으로 연수를 떠난 지 3개월밖에 안 된 상태였다. 신현진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여러 명과 함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귀국신고를 했는데, ‘하늘 같은 부장’ 김재규가 ‘새까만 졸따구’ 신현진에게 “신군, 자네 내 방으로 좀 와!”라고 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부장이 연수생을 아는지” 상당히 놀랐다. 며칠 후인 10월16일 김형욱 실종사건이 보도되자 중정 직원들 사이에는 신현진과 이만수가 김형욱 사건과 관련있다는 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현진에 따르면 부장에게 김형욱 처리 결과를 보고하자 김재규는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하는 곳이야?”라면서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각각 2개씩 주어 그중 1개씩”은 이만수에게 전해주었다. 김재규는 신현진에게 근무하고 싶은 곳이나 가족관계, 생활형편 등을 자상하게 묻고 앞으로 장가가면 살 만한 신혼집을 40~50평대 아파트로 알아보고 전화하라고 번호를 따로 적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신현진이 전한 김형욱의 최후이고,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도 이 이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과거사위원회는 김재규-이상열-신현진으로 이어지는 김형욱 살해 체계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김형욱 살해에 제3국인 2명이 동원되었다는 신현진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김재규는 해외담당 차장-차장보-담당 국장-프랑스 거점장-파견 요원으로 이어지는 공식라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상열에게 직접 지시하고 이상열은 일부 파견 요원들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핵심과제는 신현진에게 직접 지시하여 처리했다. 이상열은 과거사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 노(No)라고 기록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다. 당시 신현진, 이만수와 직접 면담했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국정원 쪽 간부들은 이상열이 살아있는 한 신현진과 이만수도 더 이상의 진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상열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2006년 4월3일 사망했다. 신현진은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법당 앞으로 가 끝없이 절을 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었다지만, 끝내 김형욱을 살해한 장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김형욱은 1977년 10월2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다시 섰을 때, 한국 역사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상하이에서 살해당한 김옥균이라는 정치인이 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 1977년 7월15일자 성명서에서 자신이 박정희에 맞선 것을 “로마를 구원하기 위해 시저(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의 과감한 용기를 택한 것”에 비유했다. 불행하게도 김형욱은 김옥균도, 브루투스도 아니었다. 박정희의 브루투스는 따로 있었다. 바로 김형욱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린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제상에 바칠 제물로 김형욱을 준비했다. 그것이 박정희에 대한 김재규의 마지막 충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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