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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소멸-신해혁명 이후 만주족의 고초
게시물ID : humorbest_11846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25
조회수 : 4951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1/11 13:56:51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1/09 15: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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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만주족에게 항복하길 거부하였다.

눈을 감고 격렬한 전투의 장면을,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쓰러진 시체가 땅을 덮은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리 조상들의 양심이 고결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손문孫文-


청 제국이 스러지기 직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된 한족들의 만주족 혐오는 20세기 초 극에 달하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태평천국운동,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으로 청 제국의 모순은 더욱 두드러지고 국토는 사분오열될 위기에 처해졌으며, 중화라는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외세 침략과 민생고는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반란으로 이어졌고, 엉뚱하게도 그 칼끝은 만주족을 향하였다.

 

1895년, 그러니까 청일전쟁 발발 1년 후, 육호동陸晧東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모든 이유를 만주족 탓으로 돌리며 만주족 혐오에 앞장선다. 그는 만주족이 '혐오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청조를 몰락시키지 않고서는 중국이 어떠한 경우에도 부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주길 바란다.' 라고 덧붙였다. 유명한 여성혁명가인 추근은 기하인의 치파오를 입지 않고 일본인의 기모노를 입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었다.


"기모노는 한당 양식을 모방하여 지은 옷이니 이것을 입는 것은 곧 중화의 복식을 제현하는 것이 아닌가!"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추용은 <혁명군> 이라는 신문을 출간하며 글을 쓰기를, '중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만주족을 추방해야 하며, 만주 황제를 처형해야만 한다.' 비단 급진적인 혁명파뿐만 아니라, 1896년의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던 양계초 또한 중화제국을 멸망시킨 만주족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1912년을 전후하여 만주족 고관대직을 대상으로 한 폭탄테러가 성행했다. 이런 단편적인 사건들만 보더라도 한족들은 만주족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1911년, 신해혁명이라 불리는, 만주족과 한족 모두에게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선통 2년 10월 10일, 무한의 신군은 무기고를 점령, 또 다른 신군 3개 연대가 이들을 도왔다. 다음 날 혁명단체의 회원들은 한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무기고와 철공소를 장악하였으며, 12일에는 한구 부대 또한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청의 전복과 만주족의 소멸을 바라였다. 1911년 10월 22일, 신서의 혁명군에 의해 수백명에 달하는 만주인이 학살당한다. 한 영국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거리는 텅 비었고 사방에는 만주족의 시체가 즐비하며, 50구의 시신이 성문 밖의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반란군은 여전히 만주족을 사냥하고 있고, 만주족 800여 명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의창에서도 만주족 여성과 아이들이 공개처형당하였다. 11월 서안에서는 약 2만 명의 만주인에게 식량 공급이 중단되었고, 이후 사흘간 혁명군은 쇠약해진 만주족을 도륙하였다. 한족 혁명파들은 청군에 의해 명의 신민들이 당했던 고초를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그러나 명 제국의 백성들이 당한 학살은 소수의 기하인들이 아닌 청에 항복한 한족 병사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였다. 또 그들은 기인들이 은과 곡식을 배급받으며 기생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만주인들은 이미 최하층민으로 전락해 있던 상태였다. 광기에 휩싸인 그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만주 지방으로 도망친 일부 운 좋은 만주족들이 아니라면, 그 대부분은 학살당하거나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끼니를 걱정하며 살게 되었다. 돈이 없으면 굶어죽었고, 돈이 많으면 혁명군들이 가산을 몰수하였기에 또한 굶어죽었다.그들은 인력거를 끌거나 곡예사, 똥지게꾼, 거렁뱅이, 매춘부가 되어 조상들의 화려한 영광을 억지로 망각한 채 살아야만 했다. 세자왕손이 성문동에서 죽고, 군주명부가 기원에 들어갔다. 어떻게든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청 황실의 골동품을 가소로울 정도의 헐값에 팔았다. 팔 물건조차 없는 일반 기하인들은 집도 먹을 것도 없이 야외에서 얼어죽어갔다. 가산이 억만에 이르렀다는 경친왕 혁광의 손자는 쓰레기를 뒤지는 처지가 되었다. 북경성 내의 칠천기녀는 대부분이 팔기자제였다.

 

지금 중국에 살고있는 만주족은 약 천만 정도라고 추정된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는 평생 떳떳치 못한 비밀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고, 임종의 순간이 되서야 만주족의 혈통을 밝히며 기인과 종족의 상세한 정보를 실토하였다 한다. 대청제국의 후손이 당한 고초의 유일한 이유는, 만주족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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