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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8
게시물ID : humorbest_12746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야설왕짐보
추천 : 12
조회수 : 694회
댓글수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7/05 22:29:15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7/05 09: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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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분량의 코믹/공포/스릴러 소설입니다. 챕터 #1 부터 보셔요. (순서대로 보시면 됩니다.) 

봉신당 : 참회의 서 #1. 귀곡성-1 : http://todayhumor.com/?panic_88655
봉신당 : 참회의 서 #1. 귀곡성-2 : http://todayhumor.com/?panic_88656

봉신당 : 참회의 서 #2. 숙 명-1 : http://todayhumor.com/?panic_88663
봉신당 : 참회의 서 #2. 숙 명-2 : http://todayhumor.com/?panic_88664

봉신당 : 참회의 서 #3. 대 결-1 : http://todayhumor.com/?panic_88677
봉신당 : 참회의 서 #3. 대 결-2 : http://todayhumor.com/?panic_88678
봉신당 : 참회의 서 #3. 대 결-3 : http://todayhumor.com/?panic_88682 

봉신당 : 참회의 서 #4. 대 면-1 : http://todayhumor.com/?panic_88700
봉신당 : 참회의 서 #4. 대 면-2 : http://todayhumor.com/?panic_88701

봉신당 : 참회의 서 #5. 악몽의 밤-1 : http://todayhumor.com/?panic_88717
봉신당 : 참회의 서 #5. 악몽의 밤-2 : http://todayhumor.com/?panic_88739
봉신당 : 참회의 서 #5. 악몽의 밤-3 : http://todayhumor.com/?panic_88745
봉신당 : 참회의 서 #5. 악몽의 밤-4 : http://todayhumor.com/?panic_88801
봉신당 : 참회의 서 #5. 악몽의 밤-5 : http://todayhumor.com/?panic_88803

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1 : http://todayhumor.com/?panic_88834
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2~3 : http://todayhumor.com/?panic_88837
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4 : http://todayhumor.com/?panic_88857
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5 : http://todayhumor.com/?panic_88882
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6 : http://todayhumor.com/?panic_88909
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7 : http://todayhumor.com/?panic_88977


 **********

 

두운 복도의 끝, 처연한 달 빛 아래 한 사내가 거친 호흡을 터트리며 다급히 돌아 섰다. 그리곤 재빨리 짙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긴다. 화들짝 놀란 얼굴과 불안한 시선이 어둠에 묻히고, 사내는 숨죽이며 먼 발치의 두 남녀를 훔쳐본다. ‘빌어먹을 놈...’ 낮은 탄식이 토해졌다. 흔들리는 동공엔 질투심과 더불어 약간의 분노가 머물렀다.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량함에 목이메인 안타까운 흐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나서지 못한 채 이를 악 물었다.

 

누이... 대체 무슨 일입니까?”

신이치군!”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사내의 품에 와락 달려드는 여자, 그녀는 조금 전 스기야마의 집무실을 정신없이 뛰쳐나갔던 메구미였다. 신이치와 메구미, 두 사람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보였다. 그가 떨리는 어깨를 감싸자 메구미는 품었던 서글픔과 수모를 쏟아냈다.

 

흐흐흑... 흐으윽...”

누이가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자마자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설마... 또 하지메가 누이를 힘들게 한 겁니까?”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마... 지금은 그냥... 흑흑

 

메구미가 옷깃을 잡아채며 얼굴을 파묻자, 신이치도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글픔과 회한은 있는 법, 비록 그 대상이 남편인 스기야마 하지메가 아닌 이청연이란 의문의 사내란 사실은 몰랐겠지만, 이러한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 신이치가 이를 갈며 말했다.

 

망할 자식... 아무리 정략결혼이었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하잖아! 누이가 왔는데도 또 외도를 한 겁니까? 개자식!”

 

신이치가 억눌린 분노를 터트리듯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사실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군부의 명망가인 오카무라 가()와 내각의 명문 고노에 가(), 두 가문은 한 때 소위 말하는 전략적인 동반자였다. 필요에 의한 결착이었으나, 꽤 오랜 시간 권력쟁취를 위한 러닝메이트로 함께 했고, 승승장구했다. 한 쪽은 군부의 최고 명문, 한 쪽은 내각의 최고 명문, 누가 봐도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자 입장은 변했다. 내내 존재해왔던 욕망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태평양 전선을 필두로 전쟁마저 격화되자 그 틈은 봉합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대동아 전쟁을 부르짖던 군부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내각마저 좌지우지하려 했다. 이에 입지가 줄어든 내각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자들로 군부를 재편하고 싶어 했다. 이른 바 두 정점의 대립이 시작 된 것이다. 결국 오카무라가는 고노에가의 반대 파벌인 총무성(總務城)의 관례집단과 손을 잡고, 고노에가는 군부의 신흥 명문과 손을 잡았다. 그 연합의 결과물 중 하나가 스기야마와 메구미의 정략결혼이었다.

 

내 잘 못입니다. 내게 조선인의 피가 흐르지만 않았어도...”

신이치!”

 

신이치가 자책하듯 한숨을 토해냈다. 어린 시절,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이치는 자신의 결혼상대가 메구미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략결혼은 당시의 명망가들에겐 매우 익숙한 형태의 교류였다. 신이치의 형 역시 얼굴조차 모르는 여자와 결혼했다. 마침 당시 고노에가와 오카무라가 두 집안의 미혼 자녀는 둘 뿐이었고, 대부분의 정략결혼이 그러하듯 나이의 고저(高低)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10살이나 차이 나던 스기야마와 메구미의 결혼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이치의 부푼 꿈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가 성인이 되기 몇 해 전 두 가문은 끝내 결별했고, 기다렸다는 듯 흉안(凶顔)의 무뢰한이 나타나 나이 스물의 꽃다운 처녀를 채 갔다. 적어도 신이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스기무라 하지메였다. 신이치는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지긋지긋한 멍에에 불과할 정략결혼이 그에겐 첫사랑과의 꿈같은 행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 신이치... 이 녀석! 누가 또 널 놀렸니? 누나한테 말해봐! 내가 대신 혼내 줄게!”

... 메구미 누나... ... 누나가 결혼을... 그것도 나이 많은 아저씨와...”

울면 지는 거야. 힘들 때 울면 삼류, 참으면 이류, 최고가 된 일류의 사람들은 웃었다 신이치. 날 봐... 웃고 있잖아. 난 이길 거야. 나이 많은 아저씨건, 사랑 한 푼 없는 가문간의 만남이든, 난 웃는다. 신이치. 그러니까 너도 웃어... 네 어머니가 조선인이란 이유로 다시는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못 하도록... 웃어!”

... 누나...”

강해져. 그리고 최고가 되라! 그럼 너도 더 이상 아무것도 뺏기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 누나는 강해 질 거야. 더는 내 인생, 아무도 간여하지 못 하도록... 언젠가 내 힘으로 서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거야... 신이치... 우리 그때까진 웃자. 알았지?”

 

메구미가 흰색의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던 날, 면으로 만든 아리따운 머리쓰개마저 그리도 애처롭던 날, 신이치는 마셔본 적도 없는 술에 취해 집에 당도했다. 그리곤 불 켜진 아버지의 방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울분을 토해낼 생각이었다. ‘! 메구미와 나를 이어주지 못하는지그걸 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밤, 신이치는 우연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고노에가와 스기야마가? !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지...”

축복받아 마땅할 혼례의 날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메구미... 참 착한 아이였는데, 잠시지만 그 아이가 우리 식구가 되는 날을 그려본 적도 있으니... 비록 돌아섰다고는 하나, 악담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결국 가문과 가문의 결별, 메구미 그 아이는 죄가 없지 않습니까.”

! 그걸 누가 모르나! 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자들과 손을 잡다니... 그 꼴이 우스울 뿐이오. 스기야마가... 넙죽 엎드려 있던 저열한 개들이 이제 사 기회를 잡았다고 고개를 빳빳이 세운 꼴이라니... 나 원 참...”

신이치가 조금만 더 나이가 찼다면, 그래서 우리 신이치와 메구미가 이어졌다면 달랐을까요?”

단지 나이 때문이라 생각하오? 더 어린 것들도 이해관계만 맞아 떨어지면 능히 맺어주는 것이 작금의 풍토! 당신 참 순진하구려! 망할 것들... 감히 나 오카무라 에이지의 아들을... 그런 사소한 결함을 이유로...”

... 그럼 설마... 저 때문에?”

어허! 내가 실수했소! 방금 한 말은 잊어주구려...”

제가 신이치, 그 아이에게 또 죄를 지었군요.”

 

어머니가 소리 없이 흐느끼자, 문 밖의 신이치도 털썩주저앉았다. 끓어오르는 절망에의 분노가 두 볼을 적셨다. 어찌 할 수 없는 출생의 근본, 태생의 한계, 유년 시절의 그를 좌절시키고 내내 인생의 벽이 되어온 천형(天刑:타고난 벌)의 저주가 또 다시 그 냉정한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누가 네 형이냐? 망할 조센징 자식... 한 번만 더 그딴 개소리를 지껄였다간, 주둥이를 박살낼 거야!”

들었어? 신이치... 조센징이래...”

설마? 걔네 아버지 유명한 군인이잖아.”

그럼 뭐해! 엄마가 첩년인데... 그것도 조선인...”

어쩐지... 시궁창의 쥐새끼 냄새가 난다 했더니...”

 

하나 뿐인 형과의 소원한 관계, 학창시절 내내 등 뒤의 수근거림이 되어 온 비애가 다시금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분노한 신이치는 그 즉시 부엌으로 달려갔다. 격한 좌절감이 서랍을 뒤져 칼을 찾아 들었다. 참아왔던 분노와 억울함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다. 신음소리 한 번 없이 손목위로 핏물이 몽글몽글 맺혀 올랐다.

 

필요 없어. 조선인의 피 따위...”

 

날카로운 칼날이 재차 손목 위를 지나고, ‘하고 떨어진 눈물방울이 섞이자 곧 거세게 쏟아졌다. 마치 제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내는 듯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정신이 드냐? 어리석은 놈... 미숙한 놈...”

 

 

깨어났을 땐 이미 병원이었다. 아버지는 참담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헌데, 어머니! 어머니가 없었다. 아들의 자해가 준 충격이 컸던 것일까? 어머니는 죄 많은 어머니가란 구절로 시작하는 짧은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홀로 먼 곳의 요양소로 떠났다. 심신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신이치는 곧 알게 됐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단순히 자신의 행위와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각의 실세 고노에가와의 단절은 오카무라가로 하여금 새로운 힘을 필요케 했다. 내각과의 연계가 끊기면 오카무라가는 군부의 섬으로 고립된다. 스기야마의 인물들이 참가한 전선에선 연일 승전보가 울려왔다. 고노에가의 역공도 만만치 않았다. 이대로는 가문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웃어른들의 판단이 있었다.

그 해 가을, 아버지는 신이치에게 새 어머니를 소개했다. 신이치와 겨우 열네살의 터울의 새어머니이자 총무성 관료집안의 딸이었다. 아들과 집안의 미래를 위해 그의 어머니가 기꺼이 제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몇 년 뒤, 신이치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문학의 꿈을 버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미술가인 형을 대신해 가업을 잇겠다는 핑계였으나 주된 요인은 역시 집을 떠나겠다는 의지였다. 사관학교는 기숙사를 제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임관, 근무지가 배정되므로 그러한 필요에 완벽히 부합했다. 군부의 명망가인 오카무라가의 자제라면 군부의 요직은 물론 본토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는 특별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며 학교장의 추천서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비록 최전방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뜻은 아버지의 뒷 작업에 의해 좌절됐지만 본토를 떠나고 싶다는 의지만은 아버지도 꺾지 못했다.

그리고 근 십년, 먼 길을 돌아서 만난 유년 시절의 첫사랑이다. 조금은 바랜 기억 속의 그녀지만, 그녀가 울고 있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제 품에 얼굴을 묻고 그 시절 소녀의 모습으로 아픔을 토로한다. 신이치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옛 사랑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었다.

 

웃어요 누이... 누이가 그랬잖아요. 울면 삼류, 참으면 이류, 일류가 될 자는 웃는다.”

신이치...”

날 봐요.”

 

신이치가 손을 뻗어 메구미의 두 뺨을 붙잡았다. 그리곤 손가락을 기울여 젖은 두 볼을 닦은 후 웃는 낯으로 말했다.

 

스기야마는 오래가지 못 할 겁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단순히 몇 차례의 총기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그러니 떠나요 누이... 그에게서 멀리, 누이가 여기 있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설마 너...”

지금은 얘기 못해요.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누이 말대로 강해지는 것, 그리고 더는 빼앗기지 않는 것, 나 그걸 위해 살았어요. 누이 말대로... 그러니... 누이도 이제 누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요. 이렇게!”

!”

 

입술이 포개졌다. 메구미는 느닷없는 행동에 당황하며 밀쳐내려 애쓰지만, 그 날의 소년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당당한 한 사람의 사내가 되어 단단한 두 팔로 억세게 끌어안는다. 여린 날의 감정이 포개진 입술 위를 뜨겁게 달궜다. 벌려진 입술사이 농밀한 해후(邂逅)의 몸짓이 넘나든다. 격정적인 옛 사랑의 토로이자 현재로 이어진 숙성된 욕망이다.

그 순간, 먼발치에서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망할 자식!”

 

분노에 치를 떠는 불안한 눈빛의 사내, 가토였다. 내내 두 사람의 사이를 엿보던 그가 끝내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섰다. 씻을 수 없는 분노와 질투심이 뒤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갑작스런 유혹의 손길, 조금의 번뇌, 그리고 이어진 뜨거웠던 육체의 시간, 하지만 불과 수 시간 전의 일들은 마치 꿈인 듯, 다른 사내의 품에 있다. 입을 맞추고 거친 숨결이 토해진다. 가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끼던 것을 빼앗긴 아이의 표정이었다. 생도시절, 수석졸업의 영예를 빼앗겼을 때도 이 만큼의 분노가 들끓지는 않았다. 단지 가문의 후광 때문에 얻은 이름뿐인 수석보단, 모두가 인정하는 당당한 차석이 낫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은 가토로서도 의외였다. 오늘 처음 부대낀 요부의 몸뚱이다. 성공을 위한 발판이자 한 순간의 유희,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헌데, 그 한 순간의 격정이 그를 소년에서 어른으로 변모시켰을까? 어른의 감정, 질투와 시기 그리고 분노, 전에 없던 뜨거운 감정들이 폭발했다. 그의 두 눈에서 불타올랐다. 가질 수 없는 것과 가장 지고 싶지 않은 상대, 그 두 가지 요소가 합쳐지자 기이한 감정의 파도가 몰아쳤다. 증오의 대상, 신이치마저 탐내는 욕망의 전리품’, 전에 없는 애틋한 감정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합리적인 이유와 지고지순한 감정만이 사랑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때론 납득할 수 없는 것들도 감정의 불을 지핀다. 어긋난 감정에의 집착이야 말로 인간의 귀와 눈을 가리는 요물, 고래(古來)로 수많은 자들을 먹어치운 괴물이 그의 가슴 속에 자리했다. 이성을 잃은 맹목적인 감정은 장애물이 앞을 막을 때 비로소 완벽을 기하는 법, 참지 못한 가토가 이를 악 물고 뛰쳐나갔다.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그의 이가 분노를 곱씹었다.

 

신이치 이 개자식... 이 가토가 또 뺏길까 보냐?”

 

어긋난 사랑의 감정이 과잉된 자의식과 뒤섞여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가토, 올해 나이 서른 셋, 조금 늦었지만 사춘기를 닮은 뜨거운 감정의 계절을 맞이한다.

만주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만!”

누이!”

 

메구미가 황급히 팔을 뻗어 밀어냈다. ‘소리를 내며 신이치의 뺨이 붉어진다. 찌푸린 미간 사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났다. 오랜 연민과 현실의 간극이 만든 괴리감이었다. 메구미의 거절이 당황스러운 듯 신이치는 다시금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왜죠? 왜죠? 스기야마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거부당한 외사랑의 애처로움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오랜 시간 숙성된 진득한 감정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좁은 곳에서 휘몰아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메구미의 표정은 단호했다. 촉촉한 눈가는 그대로이되, 예의 그 냉랭한 눈빛을 되찾아 차갑게 속삭였다.

 

그렇다고 널 사랑하지도 않아...”

메구미!”

그만! 그게 진실이야. 열다섯, 왕래가 잦던 집안의 말 잘 듣는 꼬마아이, 나한테 넌 그뿐이야. 그러니 불필요한 행동은 사양할게... 앞으로도 계속 그때의 좋은 관계로 남고 싶다면... 그만 해둬. 나한테 넌 남자가 아냐! 전혀 사내로 느껴지지 않아!”

... 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 이름은 이제... 스기야마 메구미야. 더 이상 그 옛날의 말괄량이 고노에 메구미가 아니라고! 경고하겠어! 내 남편을 건드리면, 너도 다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는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 그의 몰락은 곧 내 아이들의 몰락, 그 꼴을 두고 볼 순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 하지만...”

중요한 시기야. 아버지는 입을 다물지만, 전선의 동향 정돈 나도 알고 있어. 패전, 패전, 무리한 전쟁의 확산은 현재로선 무리,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호랑이 등에 타버린 거지... 여기서 전쟁을 멈춘다면, 아버지의 실각은 물론 군부의 지원세력조차 큰 타격을 입는다. 이 무의미한 전쟁, 그래서 계속되고 있는 거지. 석유가 떨어져 가는데도 비행기를 띄우고 배를 보내, 애꿎은 청춘들이 계속 죽어나가지만 어쩔 수 없어. 출구전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거지! 이겨야 돼! 그것만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 내 아이들은 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이을 꺼다! 그리하여 진실로 강해지겠지. 너도 알잖아! 강해져야 원하는 걸 가져.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지금의 난 그걸 위해 살아... 유치한 감정 따위에 연연할 시간 따윈 없어... 유년의 기억? 그런 건 추억으로 남기자 신이치, 넌 좋은 동생이야. 귀엽지만 사내다운 면도 있어. 그래! 한때는 널 그리워한 때도 있었어. 어리지만 결의에 찬 눈빛, 소녀들은 그런 눈빛에 기대감을 품지. 하지만 그 감정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어. 설익은 감정만으로 살아가기에... 여자는 너무 현실적인 동물이야...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신이치...”

... 누이...”

알았으면 돌아가... 난 숙소로 돌아가겠어...”

 

메구미가 돌아섰다. 굳은 표정 위로 단호한 결의가 느껴졌다. 신이치가 비틀거렸다. 돌아선 작은 등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고,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간극처럼 보였다. 두 다리가 풀리고, 동공이 흔들린다. 넘을 수 없는 세월의 벽, 유년의 변심, 현실의 굴레, 그리하여 치밀어 오르는 좌절의 체득, 망연자실한 눈빛 사이로 옛 사랑의 그림자가 멀어진다. 끝내 어둠속으로 사라져만 간다.

 

스기야마 이 개 자식... 내가 또 뺏길까 보냐?”

 

늦은 밤, 또 다른 동기생도 다짐했다. 같은 감정의 조류에 휩싸여 표류하기 시작한 두 사람의 각오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판에 박힌 말로 저주를 읊조린다. 때 늦은 사춘기의 발현과 지독히도 오랜 시간 숙성된 유년의 잔존물, 두 사람이 서로를 미워하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도 닮아 있다.’ 그 때문은 아니었을까? ‘터벅터벅어둠사이로 신이치가 걸음을 옮겼다. 벽을 의지해 힘없이 비틀대지만 가야할 곳을 모르는 이의 걸음이라 하기엔 주저함이 없다.

오카무라 신이치, 33, 묵은 감정의 해후로도 풀어내지 못한 숙제가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역시나 밤바람이 쌀쌀했던 만주의 어느 가을밤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코멘트

챕터 6의 마지막입니다. 챕터6에선 주요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설명이 주종을 이루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스토리의 진행이 거의 없고, 상황 및 제반사항 설정에 치중하는 챕터는 어렵네요.

스토리가 달려나가지 못하니, 보시는 독자분들의 시선도 도망갈까 두렵달까?

약방의 감초처럼 청연의 얼토당토않은 사건해결을 단초로 넣긴 했지만 그래도 흥미롭게 잘 전달이 되었을지 걱정입니다.

스기야마 <-> 메구미 : 어쩔 수 없는 동반자 관계

가토 <-> 신이치 : 어쩔 수 없는 숙적관계

가토 -> 메구미 <- 신이치 : 애매한 삼각관계

우치다 <-> 미자 : 미묘한 감정의 전달

청연 <-> 스기야마 : 브로맨스? 이런 느낌을 주려고 했는데... 청연♡히라타가 더 나았을지... 

챕터 7부터는 사건 해결을 위해 탐정처럼 부대 곳곳을 누비는 청연의 활약상을 그리려 합니다.

하루이틀 쉬고 다시 연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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