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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의 원형은 무엇인가?
게시물ID : humorbest_12841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46
조회수 : 12827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6/07/24 23:09:31
원본글 작성시간 : 2016/07/24 12: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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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신성한 원숭이, 하누만

 

2006년 12월 27일 <<서천제신-고대인도괴보전>>이 북경 수도박물관에서 시작되었다. 이전에, 인도국가박물관에서 온 하나의 소장품 "신후하누만흉상(神哈奴曼胸像)"은 일찌감치 각종 매체의 포커스를 받았다. 왜냐하면, 중국의 고전명작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의 원형이 바로 이 인도신화중의 신후 하누만이라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하누만이라는 이름을 지닌 인도의 신후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대영웅 제천대성 손오공이 설마 인도에서 수입한 외래품이라는 말인가?

 

하누만은 인도의 고대사서 <<라마야나(Ramayana)>>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고, 위험을 해소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하누만에 대한 숭배는 서기 4세기의 굽타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나타날 때보다 1000여년 앞서는 때이다.

 

오랫동안 일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손오공의 신세내력은 그의 여의봉처럼 신비로왔다. 사람들은 소설에 나오는 얘기를 믿었고, 티비드라마에 나오는 말을 믿었다. 즉, 손오공은 돌틈에서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술계에서는 확실히 손오공의 원형에 대하여 인도의 하누만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리고, 학술계에서는 손오공의 원형에 대하여 여러 유파로 나뉘어 각각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랫동안 명청소설을 연구해오고, 특히 서유기에 대하여 연구한 회음사범학원의 중문과 부교수 채철응은 일찌기 손오공의 원형에 대한 여러 유파에 대하여 연구하고 글을 써서 발표한 바 있다.

 


본토설 - 무지기(無支祁)가 변형되었다는 설

대표인물 : 노신(魯迅)

 

"본토설"은 "민족전통설"이라고도 부른다. 노신부터 시작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위진이래로 불교전적이 많이 번역되었고, 인도의 이야기가 많이 민간에 퍼져갔다. 문인들도 그러한 이야기가 신기하다고 생각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용했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는 점점 중국화되었다. 구체적으로 손오공의 인물이미지에 대하여 말하자면 노신은 중국의 민간전설에서 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당나라때 이공좌의 소설에 나오는 괴수-회와수신 무지기를 증거로 든다. 손오공은 여기서 변화해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손오공의 원형을 중국본토에서 찾는 것이다.

 


외래설 - 인도에서 수입하였다는 설

대표인물 : 호적(胡適)

 

"외래설"은 "인도전래설"이라고도 한다. 호적에서 시작한다. 그는 "나는 이 신통방통한 원숭이가 국산품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해왔다. 즉, 인도에서 수입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무지기의 신화도 역시 인도의 영향을 받아서 본떠 만든 것일 것이다" 그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 <<라마야나>>에서 신후 하누만을 찾았고, 이것이 바로 손오공의 최초원형이라고 주장했다.

 


혼혈설 - 다원적인 영향을 받아서 축적된 것이라는 설

대표인물 : 계선림(季羨林)

 

"혼혈설"은 "종합전형설"이라고도 부른다. 이 주장은 1980년대초에 형성되었다. 먼저 주장한 사람은 "수입설"을 취하던 계선림 선생이었다  그는 <<마라야나초탐>>이라는 글에서 "손오공이라는 이 인물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인도의 <<마라야나>>에서 빌려왔다. 그리고 무지기의 전설과도 혼합되었고, 일부 무지기의 색채도 띄게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아마도 사실에 보다 부합할 것이다" 바꾸어말하자면, 손오공의 형상은 여러 영향을 받아 겸비하고 있는 예술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불전설 - 불교경전에서 기원을 찾는 설

대표인물 : 일본학자

 

이 설을 취하는 사람은 일본학자들이 많다. 손오공의 주요 원류는 불교전적에 나오는 원숭이형의 신장(神將)이라는 설이다.

 

이상의 설 중에서 "인도전래설"을 취하는 학자들에 대하여는 이런 의문을 많이 표현한다. <<마라야나>> 또는 하누만이 도대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중국에 전래되었는가? 양준의 소개에 따르면, <<마라야나>>의 이야기는 아마도 해상로를 통하여 복건 천주로 전래되어 왔을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이유는 고대에 해상비단길이 있었는데, 중국의 동남해안에서 출발하여 남해를 거쳐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까지 간다는 것이다. 혹은 다시 인도를 거쳐 서쪽으로 아랍 또는 동아프리카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아니면 육로로 아랍과 유럽으로 간다고 본다. 해상비단길은 송나라때부터 시작하는데 주요한 출발지점이 바로 복건성의 천주였다.

 

천주의 개원사에는 후행자(行者)의 부조가 있는데, 마치 나카노 미요코에게 "손오공은 복건에서 태어났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천주 개원사에는 두 개의 남송시대의 석탑이 있는데, 동쪽이 진국탑이고 서쪽이 인수탑이다. 이 두개의 탑신에는 모두 부조가 있는데 인수탑의 4층에 원숭이 머리에 사람 몸을 가진 부조가 있다. 그의 모습은 나중의 손오공의 모습과 닮아 있고, 사람들은 그를 손오공이라고 부른다.

 

"비록 나카노 미요코는 여러 증거를 들이대며 그녀의 관점을 입증하려 했지만, 그녀 스스로 증거가 부족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 양준은 말한다.

 

최근들어 손오공의 고향이 어디인지에 대하여도 학술계에 논란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고대 강족의 원숭이토템이라는 설, 서장밀교에서 전래되었다는 설, 서북설, 복건설, 산서설, 감숙설등이 있다. "어느 주장이든 모두 연구가치는 있다. 문화예술창작은 생활에서 연유한다. 손오공의 이미지변화의 과정은 그저 어느 한 지역의 원숭이는 아니다. 분명히 서유기를 만들기 전에 여러 지역의 자료를 보았을 것이고, 각지의 전설도 참고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사람, 신, 원숭이'를 한 몸에 가진 손오공이 탄생한 것이다" 양준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 백년간 손오공의 이미지원형을 연구하는 것은 문화원형과 현실원형의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현실원형의 측면에서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영향이 비교적 컸던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견해이다.

 


당대고승(唐代高僧) 석오공(釋悟空)설

 

석오공의 속세이름은 차봉조(車奉朝)이다. 기원 751년 장광도를 따라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병으로 건타라국에서 출가한다. 기원789년에 장안으로 되돌아온다. 석오공은 현장보다 40여년 늦게 떠났다. 그러나 그의 출국지점은 안서(安西)에서 시작하고, 돌아올 때는 서역에서 번역과 전교활동을 수년간 하게 되며, 여러 사적과 전설을 남겼다. 어떤 학자는 "취경(取經)"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면서 사람들은 석오공의 이름을 전설중의 당승이 불교경전을 가지러 간 '후행자'의 이름과 연결시켜서 '손오공'의 예술이미지가 생겨났다고 본다.

 


석반타(石磐陀)설

 

하얼빈사범대학 중문과 교수인 장금지는 취경이야기를 연구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손오공의 현실원형은 <<삼장법사전>>에 기재된 현장의 서행에서 가장 곤란한 시기에 거두어들인 오랑캐제자 석반타라는 것이다. 


이유는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관계는 석반타와 현장법사의 관계와 비교할 때, (1) 가이드의 역할이 비슷하고, (2) 위난을 해결해주는 것도 비슷하고, (3) 행자의 신분도 같고, (4) 사도간의 미묘한 관계도 비슷하고, (5) 석반타는 호승(胡僧, 오랑캐승려)인데, 호승과 호손()이 발음이 비슷하다. 


래서 "당승이 경전을 구하러 가는데, 호승(오랑캐승려)가 도와주었다"는 내용이 "당승이 경전을 구하러 가는데 호손(원숭이)이 도와주었다"는 내용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출처 http://m.blog.daum.net/shanghaicrab/11025379?categoryId=158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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