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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게시물ID : humorbest_13750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9
조회수 : 1305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01/31 11:19:11
원본글 작성시간 : 2017/01/26 00:06:48
사진 출처 : http://existente.tumblr.com/
BGM 출처 : http://bgmstore.net/view/W8lNk



1.jpg

맹문재물고기에게 배우다

 

 

 

개울가에서 아픈 몸 데리고 있다가

무심히 보는 물 속

살아온 울타리에 익숙한지

물고기들은 돌덩이에 부딪히는 불상사 한번 없이

제 길을 간다

멈춰 서서 구경도 하고

눈치 보지 않고 입 벌려 배를 채우기도 하고

유유히 간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데

쉬지 않고 길을 내고

낸 길은 또 미련을 두지 않고 지운다

즐기면서 길을 내고 낸 길을 버리는 물고기들에게

나는 배운다

약한 자의 발자국을 믿는다면서

슬픈 그림자를 자꾸 눕히지 않는가

물고기들이 무수히 지나갔지만

발자국 하나 남지 않은 저 무한한 광장에

나는 들어선다







2.jpg

나희덕빗방울빗방울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그 빛그 가벼움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3.jpg

이기철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얼마나 하늘로 올라 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 할 수 있느냐







4.jpg

박상천통사론(統辭論)

 

 

 

주어와 서술어만 있으면 문장은 성립되지만

그것은 위기와 절정이 빠져버린 플롯같다

'그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라는 문장에서

부사어 '우두커니'와 목적어 '그녀를제외해버려도

'그는 바라보았다.'는 문장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는 바라보았다.'는 행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나 서술어가 아니라

차라리 부사어가 아닐까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에는

눈물도 보이지 않고

가슴 설레임도 없고

한바탕 웃음도 없고

고뇌도 없다

우리 삶은 그처럼

결말만 있는 플롯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밥을 먹은 사실이 아니라

'힘없이먹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5.jpg

이재무낙엽

 

 

 

시를 지망하는 학생이 보내온

시 한 편이 나를 울린다

세 행 짜리 짧은 시가 오늘 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한 가지에 나서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 몸으로 포개져 있다

 

그렇구나 우리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로만 안부 챙기고 만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부음이 오고 경황 중에 달려가서야

만나는구나 잠시잠깐 쓸쓸히 그렇게 만나는구나

죽음만이 떨어져 멀어진 얼굴들 불러 모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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