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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노동자 5주째 출근중입니다.
게시물ID : humorbest_13842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삐아
추천 : 57
조회수 : 6165회
댓글수 : 5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02/19 15:34:42
원본글 작성시간 : 2017/02/13 00: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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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민게에 얼마 전에 글 올렸던 사람입니다. 
무모한 결정이기도 했고 보시기에 따라서는 주작이라고 볼 수도 있는 내용이라 올리면서도 
그냥 내 얘기 나눈다는 데에 의미를 두자고 생각했는데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여기 와서 친구가 없고 솔직히 만들 생각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까지 막 몸부림 쳐가며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구요 
그저 제가 한국 친구들 , 한국 인간관계 유지하면서 또 새 친구 사귀고 섞여나가는 것까지 감당할 에너지가 
아직은 없어서요.. 소중한 사람들한테 집중하면서 요즘 제게 일어나는 업무, 성격, 생활상의 변화부터 
똑바로 소화하고 싶어요. 아직은 -제가 에너지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더욱- 이것만으로도 그냥 빡빡하네요.) 
그렇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아주 기운이 났어요. 

저는 이제 파리에서 게임회사 출근한지 5개월이 넘었습니다. 

연인과는 가끔 싸우고 그런 후에 바보같이 '나는 너를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와서 정착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헤어지면 헤어졌지 절대로 이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행복해지고 싶어서 온 거니까요. 
파리까지 온 건 제 결정이고 결과도 책임도 저 혼자 지는 것이 더 나은 제가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렇게 글로 쓰면 좀 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 

제가 한국에서 하던 일은 방송사에서 막 곁다리 사업으로 준비하는 자체 콘텐츠 게임 시나리오 작업, 
(돈은 안 되었지만 제겐 의미있었던) 작가 생활, 그리고 광고대행사 막내 AE 일들이었습니다. 
방송사 일은 해외 출장이 잦았었는데 그 과정에서 싫은 일도 당하고 문제제기하고 .. 광고 대행사에서도 
회의시간에 일어난 불쾌한 일에 문제제기 했다가 부서이동 당하고 .. 제가 위협적인 외형이 아니라서일까요, 얘한텐 뭔 짓을 해도 되겠다 생각했던지 
별 말같지도 않은 말을 하던 상사들이 밟혀서 꿈틀하는 저를 보고 나면 '무서운 애'라고 혀를 내두르더군요. 
겉과 속이 다르다고요. 저는 늘 저였을 뿐인데. 늘 떠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파리에서 직업을 구한 것은 제게 있어 정말 좋은 기회예요. 

저는 부모님 집에 살고 있었어요. 월에 버는 돈은 170-180 선이었죠. 
그나마 부모님 집에 신세를 졌으니 그 정도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었지 
만약 혼자 살아야 했다면 매달 영화 한 편 볼 때도 정말 많은 생각을 해야 했을 거란 사실을 압니다. 
오늘만은 위로가 필요해서 맛난 음식 하나 사들고 돌아가고 싶어도 고정지출에 이번달 이벤트 (어머니 생일 등등)까지 하나하나 되짚어 봐야 했겠죠. 
하지만 이 상대적으로 배부른 생활이 제게 자부심을 심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제 힘으로 얻은 것들이 아닌데 당연하게 받아 쓰는 생활 속에서 떳떳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은 신경 안 쓰셔도 
저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친구들 앞에서 좀 더 떳떳한 친구이고 싶었죠. 

부모님은 사랑했지만 원하시는 '좋은 딸'로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좋은 딸'은 26살이라는 나이에도 잉야잉야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며 '정숙한' 옷을 입고 
누가 봐도 '단정한' 머리를 하며 '평판 좋게' 행동할 줄 알고 비록 남성을 사귄 경험 없는 '정숙한' 딸이지만 
때 되면 알아서 무작위로 부유한 남성을 부모님께 인사시키러 올 줄 아는 '능력 있는' 인생을 기대받고 있었기 때문이죠. 

좀 더 빨리 저만의 자신으로 살지 못했던 게 후회스러워요. 
동시에 부모님이 준비할 시간을 드리지 못하고 급히 떠나온 게 죄송스럽기도 하죠. 

하지만 저에게나 부모님께나, 힘겨워도 언젠가 하고야 말았을 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저는 좋은 딸이 될 수 없어서 죄송한 게 아니라 애초에 좋은 딸이 될 마음을 품은 적조차 없었다는 점이 죄송한 거니까요. 
파리에 온 후로 모든 게 쉽지 않지만 이제야 한 사람 몫을 하려고 분주하게 노력하는구나 싶어 
개운한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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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선 모든 게 느립니다(특히 행정이 아주 ... ㅠㅠ) 자기가 맡은 일인데도 무슨 도떼기 시장마냥 어제 말 다르고 
오늘 말 다르고,  한 번 항의할 때랑 두 번 항의할 때 절차가 달라지는 걸 보면 이딴 놈도 직업이 있는데 
훨씬 재능있고 자기 일에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왜 직업을 얻지 못해 힘들어 하고 있을까. 세상 참 이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많이 화가 납니다. 하지만 제 일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면 .. 저는 요즘 부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제 호칭이 달라지는 걸 경험하지 못했어요.
한국에서 일할 때 저는 어느 날은 '삐아 씨'였고 어느 날은 '야' 였죠. 철저히 부르는 사람 기분 따라서요. 
저 아쉬울 때는 '우리 삐아씨' 였고 하나라도 서운한 게 있으면 '니', '야' 였습니다. 

요즘 저는 그저 '삐아'입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뭐가 부끄러운지 알고, 
다행스럽게도 상사는 자신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을 키워 딸랑뽕에 취하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서. 
일만 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이 행복해요. 몸은 힘든데 스트레스가 훨씬 덜해요. 
물론 일하면서 받는 대우와 복지가 많이 향상되었다는 점이 가장 크겠지만, 아첨이나 사람들 푸념 듣는 것에 시간 할애하지 않아도 
미움받을 걱정이 없어져서 그만큼 더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불편하고 더럽고 무례하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일 덕분에 참고 지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자유롭다고 느끼고, 전보다 제가 더 자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해요. 
앞날은 불안하지만, 한국에서 살 때라고 해서 대단히 앞날에 자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단 그저 열심히, 다가올 기회를 위해 힘을 내보려고 해요. 

저는 노오오력이라면 자신이 있는 둠한국의 젊은이니까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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