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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오해
게시물ID : humorbest_15023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ishCutlet
추천 : 37
조회수 : 6454회
댓글수 : 3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10/03 01:24:37
원본글 작성시간 : 2017/09/30 00:24:43
0.
아래에 살육의 대한 기피는 유전자 일치율인가요?라는
글에서 "유전자가 생물의 역사상 지금껏 꿀만 빨고 있는 기생충"이라는 댓글을 보고 쓰는 글입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유명한 저작이 있죠.

자기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특성은 개체의 생존에 불리한 형질입니다.
이런 형질이 어떻게 유전되고 보존될 수 있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서
개체 단위의 진화가 아닌 유전자 단위의 진화라는 답을 아주 쉽게 설명한 책이
'이기적 유전자'입니다.

그런데 이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 때문에 흔히 하는 오해가 있죠.
유전자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즉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개체를 희생시킨다는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는 "이기적"이라는 표현이 엄밀한 개념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의인화라는 사실을 간과한데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유전자와 개체의 관계를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 역시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먼저 1차원적으로 보자면,
기생충은 숙주에 의존하는 반면 숙주는 기생충에 의존하지 않는데,
유전자와 개체의 관계는 이와 다릅니다.
유전자가 개체에 의해서 보존될 뿐 아니라, 개체 역시 생명활동을 위해서 유전자를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고 유전자와 개체의 관계를 공생관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유전자와 개체의 관계를 기생관계, 공생관계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뇌세포와 사람의 관계를 기생관계, 공생관계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뇌세포는 가만히 앉아서 명령만 내리고 고생은 손발이 다하니 뇌세포가 신체에 기생하는 걸까요?
또는 뇌사상태일때 우리 몸은 생존할 수 없으므로 뇌와 신체는 공생하는 관계일까요?
어느쪽도 아니죠.
기생관계, 또는 공생관계라는 것은 개체 단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이고,
동일한 대상의 다른 단위를 가르킬때는 적용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유전자와 개체의 관계 또한, 동일한 대상의 다른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유전자가 개체에 기생한다는 개념은 엄격히 말해 틀린 것입니다.


2.
서론이 길었는데, 이보다 본격적인 문제는
'유전자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개체를 희생시킨다'라는 개념 자체가
정확한 개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과와 목적의 혼동입니다.

비슷한 혼동으로, '기린은 더 높은 가지의 나무이파리를 따먹기 위해서 목이 길어졌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목이 긴 기린이 더 높은 가지의 나무이파리를 따먹고 생존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유전자를 남겼다'는 
설명이 정확하고 올바른 설명이죠.

얼핏보기엔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엔 용불용설과 자연선택설만큼의 차이가 있죠.


진화에는 의지도 의도도 목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의지와 목적(ex.생존의 욕구)가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겁니다.
생존은 유전자의 의지도 목적도 아닙니다.
단지 우연히 발생한 수많은 유전 형질들 중에서 생존 욕구를 가진 개체가 살아남아 존속했을 뿐입니다.

진화론은 '현존하는 생명체'가 어떻게 무로부터 발생하고 발전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했기에,
생명체의 존속, 즉 생존을 진화와 생명의 목표인 것처럼 오인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시적인 생명은 단지 연쇄적으로 자기 복제를 할 뿐인 단백질 덩어리였습니다.
초기적인 단계의 생명활동이란 단지 일정한 조건에서 물질들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등한, 즉 복잡한 생명체라도 기초적인 대사활동은
여전히 일정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화학적 반응입니다.

즉, 생존을 향한 목적과 의지는 일정 이상 복잡성을 띈 개체 단위에서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이를 벗어나서 생존을 목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아미노산의 융합과정을 생존 목적의 행위라고 설명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유전자 그 자체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의 일종일 뿐이며, 어떤 의도나 의지도 가지지 않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시계가 째깍째깍 움직이는 것처럼 기계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3.진화에는 의도도 목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경향성이 존재합니다.
자기복제와 변이라는 무작위적인 현상 뿐만 아니라, 환경적인 제약과 포식으로 생명체 간의 경합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생존이라는 결과에 더 적합한 개체만이 후손을 남기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선택설입니다.

욕망과 욕구도 진화에 의해서 발생 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개체가 찾으려는, 찾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욕망입니다.
생존에 대한 욕망 역시도 진화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무작위적인 발생, 그리고 생존에 적합한 개체가 존속한다는 것이 진화의 과정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욕망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욕망을 가진 개체가 살아 남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진화란 결국 개체 단위의 생존을 통해서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이타심, 자기희생 같은 성격 특성은 설명할 수 없죠.
물론 변이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므로 이러한 개체들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생존에 부적합하다면 개체들 간의 경쟁 속에서 도태 되어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없어야 합니다.


이 모순에 대한 답을 경제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는 '구성의 오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이 사회적으로도 합리적이진 않다는 개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구성의 오류가 '절약의 역설'입니다.
불황이 왔을 때 개개인이 절약을 하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모두가 절약을 하느라 소비가 위축되면 불황은 더욱 심각해 진다는 것이죠.

'구성의 오류' 개념을 진화론에 적용하면 이타적 특성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개체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각 개체의 상대적인 생존율은 높아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체들간의 경쟁이 더 심할수록 유전자 공유집단의 생존율은 오히려 낮아지게 됩니다.
반대로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형질을 지닌 집단은, 각 개체의 경쟁력과 생존성은 낮아지게 되지만,
이러한 형질을 공유하는 유전자 공유집단의 생존성은 높아지게 되는 겁니다.

이를 설명한 것이 '이기적 유전자'입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은 그 내용을 자극적이고 압축적으로 잘 전달하고 있지만,
약간의 오해의 우려가 있는 것이죠.
유전자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개체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그런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집단이 생존에 적합 했던 것입니다.

4.결론적으로 말해, 이 글의 발단이 된 원글의 제목,
'살육에 대한 기피는 유전자 일치율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꼭 그렇진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맥락에 이어서 두가지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한가지는, 진화는 의도와 목적이 아닌 무작위적 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살아남기 충분한 정도로 발전할 뿐, 반드시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흔히 드는 예시로서 '인간의 눈'은 진화 과정상의 발생적인 이유로 인해 구조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신경이 지나는 지점에 맹점이 존재하며, 인간의 두뇌는 이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에너지를 허비합니다.
반면에 전혀 별개의 진화과정을 통해 눈을 발전시킨 문어 등 두족류의 눈은, 척추동물의 눈과는 달리 매우 효율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1441004866432[1].jpg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7967

좀 삼천포로 빠졌습니다만,
이타적 특성 또한 마찬가지로 유전자 공유집단의 생존에 최적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이
'내 부모와 내 아이는 나와 유전자 일치율이 50%, 형제는 25%, 사촌은 5.125%'라거나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일치율은 98%, 인간과 개는 80% 일치'라는 식으로 측정하지 않죠.
애초에 유전자라는 것은 현대과학이 등장한 이후에나 발견된 것이고,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인간이 유전자를 지각하는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혈연관계나 종적인 차이로 아주 추상적인 수준의 유전자 공유집단을 구분할 수는 있고
실제로 그런 기준으로 이타심과 이기심의 대상을 가르는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험칙으로, 타인보다도 자신이 기르는 개를 더 우선시 하는 경우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개보다 원숭이가 인간과 더 가까운 동물임에도 개가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도
유전자 일치율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반례를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겁니다.

내가 아닌 타자, 우리와는 다른 존재와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것은
우연적 운명에 의해 우리가 그런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일 뿐,
유전자의 농간도, 진화의 목적도, 신의 의도도 아닙니다.


5.'살육에 대한 기피는 유전자 일치율인가요?'에 대해서 두번째로 이야기 하려는 점은,
다소 사족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만, 구체적으로 '살육'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폭력성'이라는 특성 역시도 다른 형질과 마찬가지로 무작위적으로 발전한 것이고,
그것이 생존에 적합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개체는 자신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경쟁자들과 맞서 싸워야하고,
또한 자신의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폭력성은 직접적인 생존 경쟁에 직면한 개체들에게 유리한 형질입니다.

그러나 집단적인 협력을 통해 생존성을 대폭 향상시킨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생존과 직결되는 특성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불리한 특성입니다.
물론 어느정도 폭력성을 지니고 있어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기에 폭력적 형질은 끊임 없이 대물림 될 것이지만,
극단적인 폭력성, 특히 타자를 살육하는 행위는 단기적으로는 자신을 대상의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되게 만들어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고, 장기적으로는 생존을 위한 협력의 대상을 잃게 만드는 형질입니다.

유전자 일치율이라는 개념을 떠나서,
'사회성'이라는 특성이 발달한 인간에게는 생존에 부적합한 특성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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