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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글구려병
게시물ID : humorbest_15115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방울성게
추천 : 36
조회수 : 6660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10/26 00:19:11
원본글 작성시간 : 2017/10/22 04:59:46
1. 내글구려병에 대해서


이것은 실체가 없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이 병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글을 쓰는 방식, 그러니까 병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설을 쓰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소설은 한 가지 방식으로 쓰인다. 첫 번째 문장을 쓴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을 쓴다. 그것은 두 번째 문장이 된다. 그리고 다시 다음 문장을 쓴다. 세 번째 문장이다.

첫 문장을 쓰지 않으면 다음 문장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조각난 문장을 만들어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첫 문장에서 소설이 시작될 것이다. 다시 말해 <문장이 문장을 밀어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그렇다면 우리는 이전 문장에 만족하는가?>이다. 문장을 이어서 쓰려고 하는데 다시 보았더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 내 글이 구려 보인다, 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결국 그것은 <글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로 퉁칠 수 있다. 우리가 내글구려병을 해결하기 위해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왜?>이다. 왜 내 글이 구려보이는가. 글을 쓰는 간격이 길어서, 내 필력이 늘었기 때문이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지랄 맞은 병인 내글구려병을 탐구해보자.


2. 내글구려병의 원인


내글구려병의 원인은 <문장의 완성도>에 있다. 우리가 쓴 글을 다시 보았을 때,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적다. <다 괜찮은데 단어 선택이 문제라고 느끼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 물론 이 연장에는 표현이 있다. 묘사나 설명이 들어갈 때, 무언가 마뜩잖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1 그가 조용히 웃었다.
2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3 그는 웃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4 그의 웃음은 어쩐지 슬픔을 연상케 했다.
5 그가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6 울음을 참아내는 그의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우리는 <그가 웃었다>라는 골자를 두고 무수히 많은 문장을 쓸 수 있다. 개인마다 선호하는 문장의 종류는 많겠지만, 결정적으로 이 한 문장 때문에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우리가 버릇처럼 쓰는 말은 내글구려병이지, <내문장구려병>같은 게 아니다. 앞서 원인이 문장의 완성도에 있다고 했는데, 이 문장의 완성도라는 건 결국 한 문장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난해하다면 좀 더 세세하게 살펴보자.


3. 문장의 완성도


가독성이나 <무척이나> 좋은 글을 떠올려보라. 문장을 따라가는 생각의 속도가 굉장히 매끄러워서, 활자를 인식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다음 장으로 넘어가있는 글을 떠올려보라. 개인적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이 그러했다. 잠깐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책이 몇 장이나 넘어가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존나 잘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독성이 좋은 글과 내 글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내글구려병의 원인에 가독성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상적으로 문장의 완성도가 낮으면 가독성이 떨어진다. 가독성이 떨어지면 연결된 문장 사이에 틈이 생긴다. 틈이 생기면 다음 문장까지 가는 시간이 느려진다. 여기에서 <작가의 불만족>이 생겨난다. 이 부분이 내글구려병의 핵심이기도 하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 문장을 보자.

1- 어머니는 늘 쌀밥을 지었다. 항상 맛있는 건 아니었다. 수입 쌀이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 작법에 관련된 글을 썼을 때 예시로 들었던 문장이다. 위의 세 문장은 대체적으로 촘촘하게 연결된 편이다. 그래서 별다른 틈 없이, 말하자면 <생각의 여지 없이> 문장을 읽어낼 수 있다.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쓴다고 생각해보자.

2- 어머니는 늘 쌀밥을 지었다. 지호는 쌀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수입 쌀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두면 느낌이 오는가? 1번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이 2번의 문장을 쓴다면, 높은 확률로 <내 글이 구리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2번의 문장을 세부적으로 다시 나눠보자.


1 어머니는 늘 쌀밥을 지었다.
2 지호는 쌀밥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3 수입 쌀이기는 했지만.

이 문장들은 <독립적으로 쓰였을 때>는 크게 문제가 없다. 다만 이어 놓으면 문제다. 문장에 다소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진다. 가독성이 떨어지면 그건 불만의 형태, 그러니까 내글구려병으로 남는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장 단위에서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쳐야 한다. 시간을 들여서 흡족할 때까지 고쳐야만 내글구려병을 해소할 수 있다.


4. 그 외의 이야기


내글구려병은 등단을 목표로 하는 작가지망생보다는 장르문학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장르문학의 특성상, 한 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경우에 단편소설(원고지 80매 가량)을 쓰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한 달 남짓이다. A4용지로 환산하면 10장에서 11장 정도가 되는데, 이 분량은 장르문학에서는 늦어도 며칠 안에는 뽑아내야 하는 분량이다. 당연히 문장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독자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연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지정된 키로바이트 수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한 문장씩 마음에 들 때까지 손을 볼 수는 없다. 이렇게 문장을 두고 가면 나중에 다시 볼 때에는 내글구려병을 겪게 된다. 그게 아주 오래된 회차의 글이 아니라 <다만 오늘 쓰고 있는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내글구려병 때문에 글을 못 쓰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글은 답을 품고 있다. 뻔하고 유치한 이야기지만 답은 글 속에 모두 있다. 딱 두 문장만 보면 된다.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마음에 들면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보라. 여기까지도 통과가 되면 세 번째 문장과 네 번째 문장을 보라. 분명히 당신은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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