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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풀 때는 글을 써요
게시물ID : humorbest_15145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온기
추천 : 25
조회수 : 1119회
댓글수 : 8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10/31 14:43:32
원본글 작성시간 : 2017/10/26 01:01:30
딱히 읽을 사람이 없어서;

1.
어디도 연결되지 못한 점은 풀이 죽어 하늘을 봤다. 
곳곳에 창백한 푸른 점을 사람들은 별이라 불렀다. 

2.
바람이 불면 나무가 울었다. 잎맥의 감정선이 바람에 간질렸다. 울음 끝에 물든 잎은 가을이 수줍다.

3.
지금 시간의 산책은 기억에 대한 부담이 없고 잊어도 책망이 없다. 하루를 가벼운 걸음이 이어받아 지나온 하루가 숨을 고른다. 걸음을 조금 늦추면 고운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주변을 살피면 담기는 모습들이 소소하여 예쁘다. 그 시선이 내게 닿으면 동정 보다 긍정에 가까워 둘러싼 공기처럼 마음이 좋다. 비가 내려 펼친 우산을 별이 내려 접었다.

4.
추수를 기다리는 벼들이 흔들렸다. 도시에서 떨어져 지낼 때는 제때 느끼곤 했는데 빌딩 사이에서는 시기를 놓칠 뻔했다. 익은대로 거둬들이는 시절임을 새삼 느꼈다. 도정을 마친 벼들은 식탁에 올라 주린 이를 배부르게 할 것이다.

5.
편히 차오른 마음을 하늘에 걸어 두고 싶다. 
한 번의 만월로 그믐은 몇 날을 지새운다.

6.
이르게 잠을 깨면 불 꺼진 방에 고인 새벽을 닿을 수 없는 이름들에게 안배한다. 연못에 떠 있는 별들을 이삭 줍 듯 인상을 더듬는다. 한 줌에 쥐인 초상들이 포근하다. 노곤한 새벽이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7.
머리를 쓰다듬어 모닥불을 피웠다. 장작은 주어진 것들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꾸준히 불을 지키면 내 안에도 온기가 돌거라 믿는다. 구름이 주는 만큼만 먹고 자라난 들길의 꽃을 떠올렸다. 들꽃이 피어 있는 까닭에는 욕심도 없고 시선도 없었다.

8.
마음을 담굴 곳이 없어 몇 줄 문장에 백지는 우물이 됐다. 수면에 파동이 잃지 않게 허공에 흩뿌리면 좋으련만 내게는 고운 목소리가 없다. 그래도 괜찮다. 이미 이와 닮은 마음은 소리가 고운 이들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나는 할 수 있는 마땅한 일로서 잔잔한 우물에 손을 담군다.

9.
가리우지 않아도 가리어진 시간이면 세상이 공평해졌다. 해가 저문 담길을 걸으면 평등이나 균등한 분배 같은 사상의 말이 피부에 닿았다. 걸음마다 연이어지는 응달, 양지는 음지로 숨어들었다. 

10.
풍경 안에서 기쁨을 찾아본다. 가만 보니 내 눈이 선하다. 따뜻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기로 했다. 날이 맑다. 날씨가 웃었다. 나도 따라 웃는다.

11.
빼곡한 심정이 서툴게 쓴 글만도 못하다. 세간을 옮기며 떨어뜨린 편지처럼 잃을 일이다. 흘리기 쉬운 책장에 끼워두면 좋으련만 띄어쓰기 없는 문장처럼 지면 사이가 비좁다. 무어라고 이리 촘촘히 쓰여 있는가? 새벽이 차다. 거리는 비를 맞았다.

12.
오늘도 바람이 걸음을 밀었다. 낙엽처럼 쓸리고 싶었지만 여러 길로 뻗어 있는 뿌리를 끊지 못했다. 나를 지난 바람은 따뜻해졌을까? 다행히 나의 숨은 나를 녹인다.

13.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상냥한 말이 어여쁘다. 목소리를 바꾼 여자 아이는 남자 손님이 되었고 그 짧은 시간에 캐나다산 최고급 과일이 식재료로 들어왔다. 조곤조곤 말을 주고 받으니 어서 왔던 손님이 안녕히 간다.

14.
어미는 고이 잠든 별을 깨우지 않으려고 무너지는 새벽을 붙잡았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니 이룰 수 없는 일에는 뜻이 없음을 알았다. 새벽을 붙잡은 그리움에도 뜻이 없다.

15.
이름이 버거운 날이 있다. 버릴 수는 없어서 보듬어 데리고 온다. 밉기도 하다가 가엽기도 하니 아무래도 정이 들었다. 자화상을 그렸다면 고민 끝에 입고리를 올렸을 테다. 결국 웃으니 보기에 좋다.

16.
꿈에 접시를 봤다. 점점 옅어지는 갈색 빛깔이 지층처럼 칠해져 있고 소라 껍데기가 깊지 않게 세겨져 있었다. 접시 곁에 여인이 앉았다. 익숙한 여인은 접시를 보며 곱다 말했고 나는 여인을 보며 곱다 말했다.

17.
닳은 수명이 느껴지는 거리의 간판이 좋다. 어두운 곳을 은은히 밝히는 빛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공간을 다 채우지 않고 어두운 여백을 남겨두는 따뜻함이 느껴진다. 저물어 가는 것들에게도 마음을 쓰는 것 같아 고맙다.

18.
마음 속에 나 아닌 이름이 가득 찬 날은 내 이름 석 자가 소외 당한다. 언제나 닿지 못할 이름은 곁에 있었고 그리하여 나는 혼자인 적 없이 외로웠다.

19.
벗어날 수 없는 가로수는 박혀버린 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당장 떠날 수 없는 것들이 대개 그렇다. 깊게 인박혀 벗어낼 수 없는 습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부정 당한다. 그건 꽤나 아픈 이름을 세기고 사는 일이다.

20.
기억에 박제된 꽃이 있다. 훈풍이 돌 때마다 꺼내 말렸더니 시간이 지나도 향이 바라지 않는다. 마음에 들이길 잘했다. 볕이 좋은 날에는 화분이 된 기분이다.  

21.
대상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삐뚤어진 마음이 한없이 커져 갈 때 느껴지는 통제상실감이 있다. 목줄 풀린 감정의 주행은 제동장치를 잃는다. 손도 못 쓰고 자라나는 감정은 만질 수 없고 감상만 허락한다. 이럴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미워만 하고 하염없이 좋아만 했다.

22.
아주 잠깐이지만 선선히 부는 바람을 가만히 마주하는 시간, 내게는 하루마다 그 시간이 필요했다. 하염없이 들끓던 생각들이 바람에 눕는다. 바람은 자장가를 지나 왔을까?

23.
어둑한 방에 빛이 들어 시선을 돌릴 수 없다. 한 줌 빛에 부각되니 먼지 한 톨도 화사한 의미로 떠 있다. 흘러든 빛의 관심이 먼지를 무대 위로 올렸다.

24.
강 근처에 살 적에는 심심찮게 안개를 봤다. 안개가 일면 주변 풍경이 잔뜩 풀어졌다. 물을 탄 듯이 세상이 묽어지곤 했다. 뚜렷하지 않은 윤곽을 보고 있으면 곤두선 것들이 무뎌졌다.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입자가 되어 흩어지고 싶었다. 날이 선 모든 것을 완만히 굴곡시켜 흐린 경계 속에 살고 싶었다.

25.
익숙했던 것도 오래 보지 않으니 낯설다. 낯선 것은 특별하게 여겨진다. 점점 여러 것들이 익지 않다. 여러 가지로 특별해졌다.

26.
날이 더워도 이불을 살짝 덮는다. 그래야 안도하는 마음으로 하루가 함께 덮인다. 차곡차곡 하루를 덮어 두었다. 아랫목에 놋그릇처럼 따뜻해지라고. 겨운 날도 마음은 온온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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