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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그녀의 생어거지
게시물ID : humorbest_15186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냥노동자
추천 : 18
조회수 : 1024회
댓글수 : 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7/11/09 11:41:52
원본글 작성시간 : 2017/11/07 22:57:56
 
 
 
 
 
"나랑 사귀자."
 
 
나는 서울시청 앞 분수대의 그것처럼 물을 뿜었다. 여름도 아닌데 이게 무슨 물난리야.
카페 안에있던 많은 사람들이 나와 선영을 쳐다보고, 그녀는 그저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쳐다 볼 뿐이다.
 
 
"넌 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모 정치인의 성대모사를 하며 장난처럼 넘겨보려 하지만,
 
 
 
"야 장호연."
 
 
사뭇 진지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과 달리 그녀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는다.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았을 때만
보이는 저 웃음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아 싫다. 왜 오늘인거야. 그냥 밥먹고 놀다가 집에나 들어가려고 했을 뿐인데.
아니, 오늘이 아니면 언제든 괜찮다는 말은 아니니까. 흠흠.
 
 
"진짜야. 사귀자. 난 네가 좋아."
 
 
"얼만큼 좋은데?"
 
 
와. 이 정신나간 놈.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라는게 마치 허락을 구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질문 하는 것 같잖아.
3년전에 면접봤던 지금의 회사에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던 면접관의 그 말. '호연씨가 이 회사를 위해 도움이 되는 사람이길 바래요' 같은
채용확인의 상투적인 말 같잖아. 아니, 싫은건 아니야. 이런식으로 사랑이 오기를 바라진 않았다고.
 
 
"뭐? 깔깔. 그런 말 하니까 되게 재미있다 너. 얼만큼 좋냐면... 현실적으로 말해줄게. 연애 하고 싶은데 너정도 되는 사람이 주변에 없을 뿐이야.
괜찮잖아. 못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하고 취미가 엇갈리는 것도 아니고. 나도 좋아해 오버워치. 해결사가 왔어!"
 
 
퓨 퓨- 그녀는 트레이서가 총을 쏘는 듯한 포즈를 취하며 웃어댔다. 내가 경쟁전에서 트레이서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목숨당 처치가 노르망디 해변에 첫발을 내딛은 이름모를 미군의 그것과 같은 주제에... 아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나는 적어도 사랑이 이런식으로 찾아오길 바라지는 않았다. 나의 연애는 조금 더 지고지순하고 조용한, 성시경의 어느 노래가사처럼
따스한 그런 사랑의 시작이 되길 원했다. 그런데 뜬금없는 상황에서 이런식으로 고백해오는 건 개인적으로 실례라고 여겼다.
나는 할 말을 해야 했다.
 
 
"저기 말이야. 물론 네가 싫은건 아니지만 우리가 연애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길 바라지는 않아.
어 물론... 넌 예뻐. 좋아. 그리고 활발해. 나도 너와의 연애를 생각해 보지 않은건 아니지만 적어도 고백은 내 쪽에서 먼저 하고 싶었고
아니! 그러니까! 만약에 한다면 말이야! 한다면! 우린 그냥 지금같은 친구사이로 남아도 좋지 않...을까?"
 
 
레모네이드가 빨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다. 마지막에 말 끝을 흐린건 그녀의 눈치를 보기 위해서였다.
 
 
"뽕을 좀 더 넣을까? 너 가슴 큰거 좋아한다며"
 
 
"야! 조선영!"
 
 
완전히 글러먹었다. 나는 진지하게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다시 정립하려고 했던 건데 이미 그녀는 면접에 합격한 회사원마냥
첫 출근에 입을 옷을 고르고 있는 꼴이다. 내 이야기를 듣기는 하는걸까? 하느님. 내가 이런 여자에게 달콤한 앞날을 맡겨도 되는 겁니까?
그 전에 달콤할 수는 있습니까? 성모님 제발...
 
중학교때 견진성사 받은 이후로 한번도 가지 않았던 성당에 가고싶은 마음이 불쑥 찾아들었다.
내가 이런 시련을 겪는건 올해 부활절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니... 그러면 네 여자친구가 앞뒤로 똑같은 전화번호면 좋겠어? 그런거야?"
 
 
"내가 하고싶은 말은 너와 내가 연애를 할 수 없다는 거야."
 
 
그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게 왜 문제가 돼? 얼마전 홍대입구역에서 어떤 꼬마애가 달려가다
내 옷에 아이스크림을 쏟았는데 그 꼬마가 '뭐요. 왜. 닦아요.' 같은 표정을 짓고 지 엄마한테 갔을 때의 그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나는 언제나처럼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대한민국 예절교육의 중요성을 토로하며 울분을 삼켰는데
그녀는 그때도 '애를 잡아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없잖아' 라는 말을 하며 '이해하고 넘어가라' 고 말해줬다.
 
그때와 똑같다. 어쩌겠어? 일이 이렇게 된 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내 앞날과 함께 하자. 라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말과 뭐가 달라.
 
 
"알아. 네가 나와 연애를 할 수 없다는 건. 넌 이런종류의 계획없는 시작 싫어하잖아."
 
 
이제야 이야기가 좀 되려나?
 
 
"그런데 어쩌겠어. 내가 시작하겠다는데?"
 
 
젠장! 갓뎀!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을 이야기 한 것은, 너와 함께 해도 내 삶이 좋은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거라는 기대 때문이야.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내가 지금까지 지켜봐 온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과 같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 미래도 너와 함께 하는게 큰 문제는 아닐거라고 생각했어. 그것뿐이야."
 
 
"내 문제가 있을거라고는 생각 안해보셨습니까. 조선영씨?"
 
 
"네. 안해봤습니다. 장호연씨."
 
 
그녀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손바닥을 내밀어 내 거부의사를 강하게 거부했다. 우리는 잠시 조용해졌다.
카페에 홍대광의 '고마워 내사랑' 이 울려퍼지고 있다. 아. 타이밍 한번 더럽게 안좋네. 확실히 나는 계획에 없는 일은 하지 않는 주의다.
그녀의 말처럼 앞으로 내 자신에 변화를 줄 마음도 없다. 하지만...
 
"사랑이란건 그런게 아니야. 날 좋아하는 너의 마음을 존중하고... 나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 아니야.
우린 좀 더 준비를 한 뒤에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 이런식으로 시작한 사랑이 이런식으로 끝나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얼마나 슬플지, 세상이 가볍게 시작한 우리 사랑을 얼마나 비웃을 지 생각해 본 적 있냐?"
 
 
"시작이 가볍다고 마음이 가벼운건 아니지~ 바보야. 너는 왜 말에 모든 것을 담고 판단하려고 해? 말 뜻에 담긴 속뜻도 생각해보란 말이야.
'아 얘가 나랑 사귀는 오늘 밤 이 애의 속옷 아니 속뜻을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하면 더 좋고. 그렇지만 난 오늘밤 너에게
모든걸 보여줄 생각이 없어요. 깔깔. 음란하긴 남자들이란..."
 
 
완전히 졌다. 사이코를 넘어선 사차원 큐브공간의 그 어디쯤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예전에 강남 대성학원에서 사차원 단과반을 신설했다는데 그게 헛소문이 아니였구나. 차마 미...친... 으로 시작하는 말 까지는 할 수 없다.
그건 그녀에 대한 존중이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부를 만큼 나는 그녀를 가볍게 대한 적도 없으니까.
 
 
좋은사람과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꿈꿔왔다. 사차원 큐브의 어디쯤이라는 것만 빼면 선영이는 분명히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저런 활발한 사람과 미래를 함께할 수 있다면 좋을거라는 상상도 분명히 했었다.
내 마음속에 주단을 깔고 그녀의 양 손을 잡은 채 웃으며 빙글빙글 도는 유치한 상상도 했었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활발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실망을 느끼고 혼자 소심해지고, 그러다 그녀와 이야기만 하면 또 즐거워지고를 반복하곤 했었다.
 
 
"너는 네 앞에 앉은 사람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
 
 
"아뇨. 못합니다."
 
 
"왜요?"
 
 
"내 앞에 앉은 장호연은 한사람이고, 동명이인이 오더라도 내가 아는 장호연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체 내가 어디가 좋은데?"
 
 
"현실적으로 말한 그대로야. 너는 계획적이고, 변함이 없고, 꾸밈도 없어. 그게 다라니까?"
 
 
 
"너는..." 나는 말을 하려다 그것을 삼켰다.
너는 모든 이들에게 활발하고 친절하잖아.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동명이인이 와도 내가 아니면 안된다니
어느새 나의 마음에는 꽃길이 다시 펼쳐지려는 모양이다. 주단이 깔린다. 하지만 그 마음을 모두 보여주기에는, 이 여자의 행동이,
또 너무나 스스럼 없고 농담처럼 시작하는 이 순간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북악스카이웨이 카페테리아에서..."
 
"북악스카이웨이 카페테리아에서..."
 
 
우리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 세상에. 같은 말을 같은 음절로 끊어 동시에 말했다.
그녀와 나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
 
 
지금까지 빙글빙글 웃으며 장난처럼 이야기하던 그녀의 귀가 빨개진다.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숨길 수가 없다.
나 역시 그렇다. 귀와 목 주변이 뜨거워지며 광대뼈가 뜨거워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영원히 두드려지지 않을 것 같았던 심장이
고동친다. 들리나? 안들리겠지?
 
 
"먼저 말해."
 
"아냐 먼저..."
 
그녀가 괜히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며 나에게 선답할 시간을 내준다.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러니까... 북악스카이웨이 카페테리아에서... 우리가 처음 단 둘이 만났잖아. 그때 산자락을 보면서...
그 봄날에... 언젠가 내가 차가 생기면 내 차를 타고 같이 드라이브 하고 싶다는 말을 했던 그 때...에..."
 
그녀가 받아친다.
 
 
"너는 차가 아니더라도 같이 걸어도 좋을 것 같다고 했고..."
 
 
내가 말을 잇는다.
 
 
"거기가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같이 걸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지..."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홍대광의 노래는 온데간데 없이 이름모를 음악이 흐르고 있는데 우리는 아까처럼 떠들지를 못한다. 사랑노래가 아니라서 그럴거야.
신중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탓에 거부감이 들었던 사랑은 이제 나의 몸을 타고 흐른다. 아! 선영이가 생각하는 감정. 나는 갑자기 참을
수가 없어지는데, 그걸 지금까지 참고 이제서야 이야기 한거야!
 
 
"저 사실, 몸이 뜨거워. 에드벌룬을 타고 날아오를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아. 아니 그것과는 좀 달라. 지금 네가 널 꼭 안는다면
영원히 놓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한가지만 묻고싶어. 너는 지금까지 쭉 이랬었냐. 아니 이랬었어...?"
 
 
나도 모르게 말투가 조심스러워진다. 존중이야 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은 친구처럼 대할 수가 없다.
이미 그녀의 시선과 모든 행동이 날 더욱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으니까. 급작스럽게 가고 싶은 길이긴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어. 하지만 너하고 이야기 하다보면... 응..."
 
 
"준비된 사랑이 아니라도 괜찮은걸까?"
 
 
"우린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이런건."
 
 
"마음만 준비되어 있다면 말이야 아무려면..."
 
 
"말은... 반은... 내 억지야..."
 
 
"아까는 안된다고 해놓고 지금은 네 손을 잡고 싶은 것도 내 억지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약간 술에 취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손만 잡아. 팔짱은 내일이야. 키스는 일주일 뒤에 해."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는데."
 
 
그녀가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 모습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왕자를 맞는 공주처럼 그녀가 내민 손을 수줍게 잡았다. 나 역시 일어서서,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본 뒤에 손을 잡고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려요. 조선영씨."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장호연씨."
 
목소리는 왜이렇게 떨리는지. 손을 타고, 전해져 온 감정이 고개 숙여 서로의 머리가 살짝 닿았을 때 고개를 들며 본 그녀의
표정은 세상 어느것과 비교 할 수 없는 수줍음이라. 그녀는 어땠을런지.
이제서야 모든것이 해결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출구로 향했다. 그녀가 팔짱을 끼웠다.
 
 
"어? 팔짱은 내일부터라며."
 
 
"오늘밤에 키스를 할 수도 있어. 계획따윈 없어. 오버워치 하러갈래?"
 
 
"하지마. 안해."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낙엽이 저무는 계절에 떠오른 사랑이라.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게 인생이라지만, 너무 뜬금없이 찾아왔다.
내 새로운 사랑이 그렇게 찾아왔다. 티저영상 정도는 좀 보여주고 찾아오지. 아무려면 어떤가. 내 팔짱낀 오른팔로 전해져오는
그녀의 온기가 이토록 나를 억지스럽게 사랑에 빠트린 것을.
 
 
 
 
 
 
 
 
 
 
- 에필로그
 
 
나는 중요한 문제에 맞딱뜨렸다.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효자동 주민센터 앞을 산책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내가 담배를 피우는데... 그... 끊어야되나!"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던, 그 문자의 내용이 '얘가 자자고 하면 은장도를 꺼내야 되나.' 라는 말인데... 다보인다 너.
아무튼 그건 모른체 하고, 나의 흡연에 대해 묻자 그녀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펴. 길빵? 뭐라더라? 하여튼 길가면서 피우지 말고 내앞에서만 피우지 마."
 
"너 담배피우는거 질색하잖아. 아예 끊었으면 싶지 않아?"
 
"아니, 그거야 그냥 너한테 좀 더 여자여자하게 보이려고 그런거고요. 네가 알아서 끊지 않을까. 끊고싶으면."
 
나는 몸에 힘이 빠졌다.
 
"그럴거면 다른걸로 어필을 하지..."
 
 
하지만 끊긴 해야겠다. 좀 더 좋은냄새가 그녀에게 전해지길 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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