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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산행 후기.txt
게시물ID : humorbest_16027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몬미남연준
추천 : 33
조회수 : 13074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9/08/11 00:37:33
원본글 작성시간 : 2019/08/10 19: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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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오늘 나는 처음으로 안내산악회(등산하려는 산까지 왕복 차량편만 제공)를 따라 경상북도 문경의 조령산, 주흘산 연계산행을 떠났다. 우리나라의 고문(古文)을 공부하는 내게, 역사적으로 뜻깊은 문경새재를 볼 수 있는 산행은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냥 하루에 우리나라 100대 명산에 다녀왔다는 인증 2개를 할 수 있다는 데 홀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이 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다. 수많은 후기들을 읽고, 루트를 수십 번 고민하고, 산행 전날에는 술 마시는 대신 조깅을 했다. 이건 나에게 정말 굉장한 일이다. 이렇게 나름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내게 문경으로 가는 길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폭염 경보의 발령과 이번 여름 최고의 더위라는 뉴스는 나의 흥분을 꺾을 수 없었다.
    이번 산행을 기획 및 인도하시는 산행대장님은 조령·주흘산에 수십 번 와 봤지만, 아직 주흘산 정상에 오른 적이 없다고 했다. 안내산악회의 대장님들은 마치 한 마리 산토끼 같더라는 말을 익히 들은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내심 비웃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컨디션을 열심히 맞춰 온 나는 조령산을 한 마리 수사슴마냥 통통 가볍게 튀어 올라갔다. 정상에 도착하니 딱 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적잖이 빠른 사람은 정상까지 두 시간 이내로 걸린다는 대장님의 말이 생각 난 나의 교만함은 절정에 다다랐다. 여기서 나의 첫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원래 예정에 없던 백두대간 신선암봉까지 넘본 것이다. 신선암봉에서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체력이 주흘산에 오르기 전, 조령산을 내려오며 알바를 할 때 밑천을 보였다. 오버페이스와 극한의 더위로 지쳐가던 체력과, 처음으로 길을 헤매는 불안감이 더해져 한 순간에 푹 퍼져버렸다. 
    게다가 너무나도 순탄했던 등산길과는 다르게, 하산길은 몹시 거칠고 험했다. 특히 우람한 덩어리의 바위들은 그 위용과는 다르게, 요즘 여대생들의 필수품이라는 바디판타지 미스트를 뿌린 것처럼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고 있어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부커티라고 놀려대던 박 아무개가 원한을 품고 새벽에 미스트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원래부터 갓 태어난 새끼 기린처럼 불안정한 균형감각을 가진 나는 매끄러운 바위를 안정적으로 디딜 수 없었고, 몇 번 엉덩방아를 찧고 자잘한 부상을 입은 후에 대둔근을 이용해서 상당 구간을 내려가게 되었다.
    조령산 정상과 신선암봉까지 오르는 데 걸린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주흘산의 들머리(등산 진입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때, 여기서 막걸리나 마시고 기분 좋게 귀가하지 않고, 차마 미련이 남아서 주흘산을 정복하려 한 두 번째 실수를 범하게 된다. 
    주흘산에 접어든 지 1km나 되었을까? 한여름철에 인기 없는 산이다 보니, 무성한 수풀로 뒤덮여 등산로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정말 감사하게도 젊은 남성 한 분이 성큼성큼 나를 앞질러 갔다. 나는 옳다꾸나 하고 그 분의 뒤를 따랐고, 우리는 함께 알바를 했다. 잠시 쉬는 사이에 어느덧 나는 혼자 남게 되었고, 무선데이터도 연결되지 않는 험준한 산 속에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육군에서 복무하던 시절,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의 슬로건이었던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라는 말 딱 한 가지는 참 좋아했다. 홀로 남겨진 내 머릿속에 마침 그 구절이 떠올랐다. 그 말을 따라 '높은 곳으로 가다 보면 정상이 나오겠지!'라는, 옆집 세파트도 안 할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위로, 위로 향했다. 도저히 손쓸 수 없는 거대한 암벽을 마주하기 전까진. 이미 체력이 고갈된 나는 좌절했다. 육군에서 하는 말을 믿다가, 그들의 본분인 삽질만 하게 됐다. 이제는 도대체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그래서 앞으로는 입대를 앞둔 후배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육군을 추천하려고 한다.
    아무튼 이제는 시간마저 너무 촉박해졌다. 주검이 된 채 발견되는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이제서야 주흘산을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근성을 쥐어 짜 나침반에 의지하며, 이후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남서쪽으로 내려갔다. 썩은 나무기둥에 속아가며, 대둔근에 의지해 내려갔고, 끝내 등산객을 만날 수 있었다. 구조선을 발견한 로빈슨 크루소의 심정이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하산 후 문경새재 2관문에서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참 멀었다. 애초에 목표했던 주흘산에 오르지 못한 내 심정은 한없이 비참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대부분은 산책길에 놀러온 커플이라 자기들끼리 알콩달콩 노느라 나한테는 관심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래서 더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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