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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 밀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게시물ID : humorbest_5265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ㄻㄻ
추천 : 50
조회수 : 3328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2/09/12 16:08:23
원본글 작성시간 : 2012/09/10 16:57:45


현지시간 9월 7일 금요일, 2012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식이 거행되었다. 랄프 샘슨, 자말 윌크스를 비롯해 돈 넬슨, 필 나이트 등 농구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NBA.com』은 무려 4일간, 한 깡마른 농구선수의 얼굴을 메인화면에 걸며 예우를 표했다.

평범함 속 특별함

이윽고 레지 밀러의 이름이 호명되자, 카메라는 밀러의 표정을 비췄다. 옛 동료들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진심어린 축하를 보냈다. 밀러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누나, 셰릴 밀러(48)와 함께 포옹을 나눴다. 곧 명예의 전당 안의 모두가 기립 박수를 치며 “레지! 레지! 레지!”를 연호했다.

NBA 역대 최고의 슈터, ‘밀러타임’ 레지 밀러(47, 201cm)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순간이었다. 단상에 오른 밀러는 가족과 팬들, 인디애나 페이서스 시절 동료들, 그리고 맞붙었던 모든 상대 선수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또, 선수시절 에피소드를 쏟아내며 좌중을 웃기는가 하면, “역대 최고의 선수 세 명이 이 자리에 와있다.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셰릴 밀러”라며 본인을 축하해주러 올라온 동료, 현역 시절 최강의 적, 누나까지 모두 챙기는 훈훈함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에 청중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건 현역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팬들은 밀러의 몸짓 하나에 울고 웃었다. 잘 생긴 것도 아니고 근육질의 몸매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구를 기가 막히게 잘 하던 선수도 아니었다.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묘하게 끌리는 선수였다. 밀러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현실판 포레스트 검프

명배우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선천적 소아마비로 인해 제대로 걷지 못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달릴 수 있게 되고, 심지어 매우 잘 달릴 수 있게 되면서 풋볼 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밀러가 바로 그랬다. 어린 시절 선천성 고관절 기형으로 인해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보조기구 없이 걷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40여년이 흐른 지금, 밀러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로 선천적 장애를 극복한 것이었다. 전설 혹은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점점 상태가 호전되어 더 이상 보조기구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밀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농구 코트였다고 한다.

어린 밀러는 누나 셰릴과 함께 동네 코트를 휩쓸고 다녔다. 이 남매 콤비는 천하무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어쩌면 미래의 ‘명예의 전당 남매’를 당할 사람이 있는 게 더 이상했을지도. 셰릴은 지난 1995년에 이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전설적인 선수로, ‘여자농구계의 마이클 조던’으로 불린다.

둘은 서로 1대1 대결을 즐기며 실력을 키웠는데 대부분의 경우 누나인 셰릴이 이겼다. 밀러는 훗날 “1대1 대결은 내가 키가 자라 누나의 슛을 블록할 수 있게 되면서 그만 두게 됐다”고 당시를 회고한 적 있다. 또, 밀러의 특이한 슛 폼은 셰릴의 블록슛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누나와 관련한 재미난 일화도 있다. 고교시절 밀러는 35점을 올리고 의기양양해서 집에 돌아와 자랑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하필 그날 셰릴이 무려 105점을 폭발시켰던 것. 매일 함께 농구했던 누나가 알고 보니 ‘지구에서 제일 잘하는 누나’였던 것이다.

반전 있는 남자

경기 막판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한 방을 ‘클러치(Clutch)’라고 한다. 이 능력이 뛰어난 선수를 클러치 플레이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레지 밀러를 ‘역대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 또는 ‘미스터 클러치’라고 부른다.


4쿼터에만 25점을 쏟아 부어 뉴욕 닉스를 침몰시킨 1994 플레이오프, 4쿼터 막판 8.9초 만에 8점을 몰아넣어 강제승리(?)했던 1995 플레이오프, 마이클 조던을 밀치고 극적인 역전 3점포를 작렬시킨 1998 플레이오프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처럼 밀러는 유난히 승부처에 강했는데, 사람들은 ‘밀러가 활약하는 승부처’를 가리켜 ‘밀러타임(Miller Time)’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밀러는 ‘버저 울리기 전에 위닝샷 때리는 사나이’였고, ‘4쿼터가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였다. ‘그런 사나이’였고, ‘그런 반전 있는 남자’였다. 경기 내내 부진하다가도 마지막 순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여 상대 팀에 비수를 꽂았다.

실제로 2004 플레이오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의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1차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밀러는 4쿼터 후반까지 여섯 개의 야투를 던져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하며 부진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경기 종료 31초 전, 극적인 끝내기 3점포를 터뜨리며 해결사 본능을 발휘했다. 당시 디트로이트의 감독이었던 래리 브라운 “밀러는 내가 본 역대 최고의 클러치 슈터”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1998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4차전, 경기 종료까지는 10초도 채 남지 않은 상태. 인디애나는 뉴욕에 3점차로 뒤지고 있었다. 인디애나의 포인트가드였던 마크 잭슨(現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밀러에게 패스를 했고, 밀러는 닉스 킬러로서 늘 그래왔듯, 깨끗하게 클러치 3점슛을 꽂아 넣었다. 경기는 연장으로 돌입했고, 밀러는 연장에서도 7점을 뽑아내며 맹활약,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날 밀러는 총 38점을 퍼부었다.

잭슨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내가 아무리 슛 감이 좋고, 밀러가 그날 계속 부진했더라도 클러치 타임이 오면 난 주저 없이 밀러에게 패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밀러가 동료들에게 얼마나 신뢰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는 부실, 잇몸 튼튼

현역 최고의 슈퍼스타, 코비 브라이언트는 지난 2009년 열린 ‘코비캠프’ 행사 도중 “가장 막기 힘든 선수를 꼽아 달라”는 질문에 “레지 밀러”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선수들이 밀러를 수비하기 힘들다는 고충을 토로한 바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는 밀러의 압도적인 활동량에 기인한다.

밀러는 기본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별로 없었다. 볼 핸들링은 형편없고, 몸싸움도 약했다. 운동능력이 떨어지다보니 돌파는 로또 수준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수들보다 더 많이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됐다. 조금이라도 더 뛰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슛 기회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인 것은 슛 감각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누나의 블록을 피해 최대한 멀리서 던지던 슛은 밀러가 가진 최고의 무기가 됐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몸이 안 따라주면 악바리 근성으로 때웠다. 돌파가 안 되면 슛 하면 되고, 드리블이 안 되면 공 없이 뛰면 그만이었다. 밀러는 자신에게 시련이 닥치면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왔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샛길이라도 찾아낸 것이다.

밀러타임은 영원하리라

밀러는 단 한 번도 리그 최고의 선수였던 적은 없다. 심지어 집에서조차 두 번째 선수였다. 최고는 아니었지만 늘 최선을 다했다. 신체능력이 떨어지면 남들보다 한 발 더 뛰어서 그 간극을 메웠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 성공한다”는 조언은,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속고 싶은 달콤한 이야기다. 동시에, 밀러가 나태한 우리에게 전하는 일갈이기도 하다.

결국, 밀러가 가진 뭔가 특별한 것은 ‘희망’이었다. 언제든지 경기를 뒤집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시련과 역경을 딛고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나아가 노력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그랬다. 밀러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 특별할 것 하나 없던 선수는, 그렇게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밀러타임’의 의미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생의 승부처는 지금이다. 달리 말하면 철수에게는 철수타임, 근혜에게는 근혜타임인 것이다. 누구나 희망이라는 이름의 공을 던져 역전 버저비터를 터뜨릴 수 있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진짜 ‘밀러타임’은 아닐까. 우리 인생의 승부처는 지금인 것 같다.

사진_NBA아시아

  2012-09-10   이승기 칼럼니스트([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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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기 기자가 글 찰지게 잘 썼네요. 혼자 보기 아까워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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