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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보병의 역사 - 공화정 로마
게시물ID : humorbest_6136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8
조회수 : 2301회
댓글수 : 3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1/22 16:53:19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1/20 18:50:11

출처 : http://blog.naver.com/cahdol?Redirect=Log&logNo=8931282&from=postView

 

현대 보병의 원조는 역시 로마군이다. 서구 거의 모든 국가 보병의 기틀도 로마시대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행진하는 로마 보병의 모습은 각종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미지일 것이다. 물론 실제와는 거리가 있지만..

초기 로마 보병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인접한 에트루리아의 보병이었다. 에트루리아 보병은 그리스 호플리테스의 영향을 받아서 상당히 흡사한 모습을 보였는데, 청동으로 만든 흉갑을 입었고, 원형 호플론 방패와 창을 들었다. 이 창이 이후 로마군의 주무기가 된 필룸(Pilum)의 원형이 되었다.

로마군 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기병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군의 중추를 이룬 것은 시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었다. 로마 역시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력을 갖춘 시민만이 중장보병으로 참가할 수 있었다.

초기의 로마 중장보병의 모습은 대체로 깃털을 꽂은 청동 투구에 가슴에는 사각형의 철판을 댄 모습이었다. 중장보병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모습이지만 초기 로마인들은 이것을 중장비로 생각했다.

 

 

초기 로마 중장보병의 모습을 재현한 사진이다.(출처: 로마니타스akkad.ne.kr) 청동 투구는 B.C 1세기 무렵부터 철제 투구로 바뀌게 된다. 갑옷 속에는 로마인의 평상복인 투니카를 입었는데, 로마 전사들은 대체로 붉은 투니카를 선호한 듯 하다. 기록에도 이러한 규정이 남아있다. 적의 피로 옷이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붉은 색 염료는 비쌌기 때문에 과연 전부 붉은 투니카를 입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중장보병은 대개 3열로 포진했는데, 연령에 따라 하스타투스,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우스로 나누었다. 대체로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우스는 하스타투스보다 더 중무장했다. 물론 갑옷을 각자 준비했기 때문에 위의 사진으로 완벽하게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무기는 창 두 자루를 휴대하게 했다. 필라라고 불리는 창과 필룸이라고 불리는 창, 두 종류가 있었다. 필라는 가벼운 투창으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적진을 향해 내던졌다. 필룸은 일반적인 투창보다는 무겁고 그리스의 백병전용 창보다는 가벼웠다. 로마군은 이 필룸을 투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백병전에 사용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적진과 충돌하기 직전에 일제히 던지고 칼을 빼서 백병전을 치렀다.

칼은 그리스와 달리 로마에서는 부무장이 아니라 주무장 중 하나였다. 대부분 창을 먼저 던지고 칼만 들고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었다. 초기의 칼은 날이 휜 장검이 많았다. 이후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50-70cm 정도의 양날검으로 변화한다. 이것을 글라디우스라 부른다.

방패는 목재 두 장을 겹쳐서 만들고 테두리와 가운데를 금속으로 보강했다. 로마군은 이 방패로 몸을 가리고 칼로 적을 찌르는 방식으로 전투를 치렀다.

로마군의 대형은 초기에는 그리스 팔랑크스와 흡사했으나 기동성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개량을 하게 된다. 부대를 100명 단위의 소부대로 나누고 그것을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시켜 각 소부대를 지원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백인대이다. 나중에는 100명의 구성원이 80명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백인대를 구성하는 병사 개개인도 서로 엇갈리게 포진하여 서로를 지원할 수 있게 하고, 부대 전체의 기동성을 높였다.

중장보병 외에도 경장보병이 있었다. 경장보병은 벨리테스라고 불렀는데 간단한 투구나 늑대가죽을 썼다. 무기는 투창이나 돌팔매였다. 이들은 하층시민이 중심이 되었는데, 중장보병의 전면에 서서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투척무기로 적진을 교란했다.

기병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양익을 엄호하거나 적을 추격하는 임무, 정찰 임무에만 동원되었다.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 부족했고, 등자와 같은 장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기병을 에퀴타스라고 하는데 가장 부유한 시민만이 기병으로 참전했다.

B.C 3세기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의 침공까지 이런 형태의 군대가 유지되었다.

B.C 264년. 카르타고와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면서 로마 보병의 장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중장보병은 더 이상 작은 금속판만 걸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촘촘히 짜인 체인메일을 입었는데, 이것이 이후 공화정 로마군이 표준장비가 된다. 각자 준비하더라도 체인메일은 형태가 다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라고 부른다. 체인메일은 많은 수의 쇠고리를 연결하여 만든 갑옷인데 튼튼하고, 베는 공격을 방어하는데 뛰어난 성능을 가진 갑옷이다. 2차 포에니 전쟁때는 한니발 휘하의 보병들도 이 갑옷을 선호하여 자신들이 죽인 로마군의 시체로부터 로리카 하마타를 노획해 즐겨 입었다.

 

포에니 전쟁 당시의 로마군을 재현한 그림이다.(출처: 로마니타스) 오른쪽의 갑옷을 걸치지 않은 병사가 경장보병인 벨리테스이다. 저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로마 전사들이 이런 차림이었다. 군단의 중추인 백인대장들은 복장이 제각각이었다. 스케일 아머(비늘갑옷)을 입은 모습이 조각에서 많이 발견된다. 장교들은 로리카라고 불리는 금속이나 가죽제 갑옷을 입었다. 이것은 사람의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흉갑으로 근육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군단장 급의 고급 장교가 입었던 로리카에는 정교한 돋을새김으로 화려한 장식이 더해졌다.

 

금속제 로리카(출처: 아이스워드www.isword.co.kr)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로마 보병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이때부터 로마 군은 현대 서구와 같은 직업군인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았고, 장비도 더 이상 개인이 준비하지 않았다. 군복을 국가에서 지급함에 따라서 복장이 자연스럽게 통일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통일된 군복을 입었던 군대의 탄생이었다. 제정 초기까지 이들의 제식 군복은 여전히 로리카 하마타였지만 투구의 모양이나 방패 등 각종 장비의 모양이 통일되었다. 통일된 군복을 갖춘 군대는 이후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가 근대 이후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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