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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 현대인 괴담 - 당신이 잠드는 곳 편
게시물ID : humorbest_6642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32
조회수 : 3106회
댓글수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4/22 23:54:50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4/22 22:21:59




전업주부 L은 아침이 가장 바쁜 시간이다.
L은 오늘도 평소와 같이 전쟁과 같은 아침을 보냈다.

누구보다 아침의 시작이 빠른 남편.

L은 남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같이
남편보다 한 시간 앞서 잠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항상 10분에서 15분 정도 늦장을 부리는 남편 때문에 오늘도 그를 부산스럽게 배웅해야 했다.
그리고 곧 2차전. 2차전부터는 열네 살 난 큰 딸과 열한 살의 작은 아들을 깨워야 한다.

두 아이 모두 아직 어린티를 내고 싶어 하는지, 침대를 잘 벗어나지 못하기에 L은 항상 애를 먹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서부턴 조금 느긋해 질 수 있었지만, 오늘은 빨래 감이 한참이었고,
저녁에는 남편의 생일 식탁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생각해 놓은 메뉴가 산더미 같아, 인터넷 쇼핑몰 서비스로
미리 예약 주문을 해 놓았던 L은 오늘따라 시계를 보는 횟수가 늘었다.

시간은 아직 이른 점심. 초인종이 울렸다. L은 현관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오후 즘으로 예정 돼있던 배달이 조금 일찍 도착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L은 무릎 위에서 접고 있던 남편의 와이셔츠를 서둘러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반가운 마음에선지 L은 현관 카메라 영상을 확인할 것도 없이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현관에는 기다리고 있던 배달원은 찾아오지 않았고, 젊어 보이는 여자가 한 명 서있었다.
여자는 급하게 A4 용지를 한 장 내밀곤 뒤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L은 “저기요!” 하고 그녀를 불렀으나, 여자는 뒤돌아보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아래층으로 사라져버렸다.

“별난 여자네.”

L은 젊은 여자가 넘겨준 A4 용지를 내려다보았다.

L은 종이에 쓰인 글이 아마도 최근 아파트 관리소에서 자주 말하는 쓰레기 분리수거에 대한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별것도 아닌 것에 공을 들이고 있는 동장 아주머니 생각에 코웃음이 났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원도 S시에 살고 있는 김 나영 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렇게 불쑥 찾아뵙고, 이런 식으로 저의 가슴앓이를 토로하는 것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당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하여, 말씀이 드리고 싶어 이렇게 장문의 글을 씁니다.
읽지 않고 버리셔도 어찌할 수 없는 바 입니다만,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어린것의 청을 딱히 여겨, 부디 이 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남편과 4년 전부터 S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근무하고 있던 시멘트 공장이 S시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저는 스무 살에 만나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지금에서도 후회하지 않는 제 일생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남편의 공장은 매일같이 오랜 시간 그를 일터에 붙잡아 두었지만,
넉넉한 급료와 따뜻한 공장사람들의 인정이 있어,
저와 그이는 공장이 망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S시에서 평생을 살고만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얄궂기만 합니다.

남편의 일은 시멘트공장에서 큰 바위와 돌멩이들을 분쇄기에 운반하는 일이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남편은 작업하는 능률이 좋고, 손기술도 뛰어나
공장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까요.

남편은 운반기사일을 하면서 분쇄기의 수리를 배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지게차 운전만 하는 것으론 S시에서의 미래를 약속하기 어려웠으니까요.

분쇄기는 일제의 제품으로 1920년에 만들어진 물건이었기 때문에 잔고장이 심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제게 좋은 소식처럼 말해주곤 했었습니다. 나도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직급을 달 수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하구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습니다.

행복하기만 한 시간 속에 첫아이를 임신했었고,
남편은 말해온 것처럼 조장이라는 직급을 달게 되었습니다.

남들에 비해 빠른 진급이었지만, 동료들은 남편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곤 했습니다.
항상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한다고 말했었죠.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날도 평소처럼 바위가 분쇄기에 걸려버렸다 합니다.

평소에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남편은 기계를 정지하고 바위를 드러내 기계를 수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점심시간 이었는데도 남편은 금방 고치고 가겠다며 동료들을 먼저 식당에 보냈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생긴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남편보다 늦게 자리를 나서던 한 동료분이
남편이 분쇄기 내부 정비를 하는 줄도 모르고 분쇄기의 전원을 올린 것이지요.

수리는 조금 나중에 해도 좋으니, 어서 밥을 먹자고 말하려 돌아온 남편의 사수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곤 서둘러 기계를 정지시켰지만, 남편은 이미 분쇄기 안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분쇄기를 통과한 잔해에서 남편의 지갑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전해 준 것도 남편의 사수인 그였습니다.

돌을 분쇄하는 기계였기 때문인지 지갑 속에 있던 아이의 초음파 사진과
우리가 처음 만나서 찍었던 사진은 완전히 분쇄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갈가리 찢겨버린 사진은 제 모형을 찾기가 어려웠죠.

저는 남편의 기리고 싶었습니다. 공장 측에서 저를 위한 위로금과 배상은 충분히 해 주었습니다.
그 사고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저는 추호도 공장 사람들을 탓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만큼이나 남편의 사고를 가슴 아파 했으니까요.

제가 댁으로 찾아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날 만들어진 시멘트가 사용 된 곳이
바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의 아파트이기 때문입니다.

이 넓은 곳 어디에 그가 묻혀있는 지는 알 수 없기에 저는 아파트 모든 분들 게 이 편지를 드립니다.
부디 그이가 잠들어 있는 곳이 평안하도록, 조금만, 아주 조금만 마음을 써서 소중하게 집을 사용해 주세요.

댁의 평안이 그와 함께 할 수 있도록 빕니다. 두루 좋은 나날 계속되시길 빌며.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L은 글을 바닥에 떨궈버렸다.

미동도 없이 읽어 내린 젊은 여인의 편지를 읽고
서둘러 전화기를 들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자기 오늘 생일이잖아요. 아침에 말 못해줘서요.”
“별, 생일 한두 번 맞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알았어. 고마워.”
“아니에요. 오늘 일찍 들어오세요. 집에 음식 많이 준비하고 있을게요.”
“어허~ 그래도 내가 결혼 하나는 잘 했네!”
“여보.”
“응?”
“….”
“….”
“아니에요. 꼭 일찍 돌아와요.”
“그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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