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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사치스럽다.
게시물ID : humorbest_7000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겐세
추천 : 40
조회수 : 3984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6/22 02:00:25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6/20 19:55:15

http://bravomybreast.com/909

사치스럽다


오늘 오후 열릴 예정인 

보건복지부와 국립암센터가 주관하는 암정복포럼은 

암생존자 (cancer survivorship)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자리이다.


암생존자라는 말은 1985년 미국 NCCN 에서 survivor or survivorship 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으로 개념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암을 발견한 시점부터 생존자라는 광범한 관점을 채택하였고 암 치료와 관련된 사회적, 감정적, 경제적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는 생존자 그룹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이 태동하였고 이들은 암 치료 이후 생존자들의 건강과 안녕, 복지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가 전체 암연구 영역에서 병행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각종 기금과 재단을 설립하였다. 유럽에서는 국가 지도자들과 유명한 의사들이 이러한 운동에 동참하여 암 생존자 문제를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생존자라는 말은 환자 혹은 희생자, 고통받는 자의 무기력함을 반영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죽음의 위험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생존을 당지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만 귀결시키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여 암생존자라는 개념 자체를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를 위한 관점에는 

건강, 복지, 치유의 과정을 통합적으로 접목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단지 생존의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삶의 질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cancer survivorship의 책심적인 가치라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암생존자라는 말보다 '암경험자'라는 개념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등장하고 있다. 완치되지 않아도 오래 사는 4기 암환자들이 많아진 것은 좋은 약이 많이 개발된 덕, 수술기법이 발전한 덕, 방사선치료기법이 정교화된 덕, 이러한 총체적인 의료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측면이 크다. 


그러므로 이제 암생존자는 최초의 적극적인 암 치료가 끝난지 5년 이후 살아있는 사람을 암생존자라고 간주하던 시간적 개념을 뛰어 넘어, 암의 긴 여정, 즉 암 예방, 조기 진단, 치료, 그리고 그 이후의 survivorship 을 연속선상에 놓고, 일관적이며 총체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도래하고 있다. 


흔히 암생존자를 위한 survivorship program 은 재발의 두려움에 대한 정신적, 정서직 지지가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암 관련, 혹은 암 치료 관련 발생할 수 있는 신체적 합병증, 혹은 후기 신체적 후유증에 대해 발표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런 신체적 이슈들에 대해 과도한 비용증가를 상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모니터링 프로그램과 코호트 연구가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발표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슬라이드를 점검하며

어떤 말로 발표의 운을 띄울지

마무리는 어떻게 하는게 효과적일지 

고민하는 중에 

보험심사과의 메일을 받았다.


진료비 환불 관련 민원서류를 작성하라는 메일이었다. 


환자는 탁솔의 generic drug인 파덱솔로 항암치료를 받았다. 한글말로 옮기기도 어려운 Malignant mullerian mixed tumor (MMMT 매번 스펠링이 헷갈릴 정도로 드문 병) 에서 여러 약제를 쓰다가 탁센 계열의 항암제를 8번 투여한 것에 대한 환급 요청서였다. 환자는 이 약 말고도 방사선 치료에 대해서도 같은 민원을 제기하였다. 이 병의 예후를 고려하건데 8번 항암제를 유지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니 평균적인 약제 반응기간 보다 좋은 성적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날짜를 보니 환자 사망 후 보호자가 민원을 제기하였다. 사망하였으니 환자는 더 이상 병원에 올 일이 없다. 인터넷 클릭 한번으로 민원을 접수하면 심평원이 알아서 해당 병원에 서류를 보내고 병원 보험심사팀과 의사가 제출한 서류를 토대로 상황을 판단하여 병원에 환급명령을 내리면 되기 때문에, 대개 이런 민원은 환자 사망 이후에 발생한다. 보호자도 어색하게 더 이상 의사 얼굴 안 봐도 된다. 


환자들은 

제발 최고로 좋은 약으로 치료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자궁암(endometrial cancer)은 현재 보험 제도 하에서는 아드리아마이신이랑 씨스플라틴 병용요법 이외에는 보험이 되는 약제가 없다. 이 약을 쓴 후 한번만 재발해도 쓸 약이 없다. 물론 값이 싼 일군 항암제 단일요법으로 보험이 되게 치료할 수 있다. 한번 맞는데 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맞을 수 있는 부담없는 가격이다. 그러나 그런 약들은 효과도 모른다. 연구된 바 없다. 그런 약을 쓰는 건 말도 안된다. 

탁솔은 이군항암제이고 임의비급여이다. 연구는 많이 되었다. 탁솔과 카보플라틴이 효과가 제일 낫고 독성도 덜하다. 그러나 1군 항암제인 카보플라틴은 어느 시점에 써도 삭감이 되지 않지만 이 병에서는 탁솔은 임의비급여. 즉 불법진료에 해당하여 환자의 환급요청 시 의사 처방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국가는 의료비용의 천문학적인 증가를 억제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의사의 항암제 사용 요법을 제한하고 있다. 


아스코가서 공부하면 뭘 하나, 첨단 표적 치료제가 개발되면 뭐하나. 20년전에 개발된 탁솔도 제대로 쓸 수 없는 형국이다. 


나는 발표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날라온 메일을 받고 민원 서류를 작성하면서 

내가 지금 발표하려고 하는 생존자 운운, 암 환자의 삶의 질 운운 하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 체계 하에서는 매우 사치스러운 말잔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사의 사회적 책임

국가를 상대로

심평원을 상대로

끊임없이 근거를 제시하고

적절한 의료서비스의 총량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입장을 제안하는 일이 필요함은 인정한다.

그것은 전문가로서 가져야 할 가치이자 사회적 책무이다.

또한 개별 의사가 할 수 없는 역할에 대해 학회와 유관 단체가 의사의 집단적 책임을 대표하여 사회적 이슈를 설명하고 의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력을 더욱 더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들의 노력이 개별 의사 회원들의 뜻을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 수행한 역할에 대한 평가도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문가라는 이름은 참으로 제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많은 덕목을 요구하는 자리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의사들이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의사라면 누구라도 그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전문가로서 의견을 제안해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너무나 많은 사회적 국가적 책임과 공론화될 필요가 있는 이슈들을 

개별 의사의 책임으로 전가하여 

현행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정부의 입장은 

참을 수 없다.


오늘 발표, 부질없다는 생각이다. 


생존자까지 챙길 정신이 어디 있는가 

지금 눈 앞의 환자도 제대로 못 보는 판국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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