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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박정희 혈서를 부정하는 수구진영의 주장에 대한 완벽반박
게시물ID : humorbest_7942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lidarite
추천 : 67
조회수 : 4721회
댓글수 : 8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12/07 13:26:49
원본글 작성시간 : 2013/12/04 23:42:10

http://blog.naver.com/why0302?Redirect=Log&logNo=30167202664


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혈서를 썼다고 보며 오래전부터 꾸준히 박 전 대통령 혈서가 조작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박 전 대통령 혈서사건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고 또 조작설에 대한 반박을 해보려 한다. 반박을 하려면 끝까지 정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 박정희 혈서 누가 들췄나 ?


박정희 대통령 혈서건을 들춰낸 사람은 현재는 보수논객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갑제 기자님입니다. 조갑제씨는 박정희의 동료교사인 유증선씨의 증언을 최초로 담았으며 거기서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정보를 얻었고 1962년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 (박정희의 비서) 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도 비슷한 대목이 발견됐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유증선씨 증언과 이낙선씨 비망록 내용은 위 링크를 통해 들어가 확인할 수 있다.

 

2. 어떻게 들어갔는가 - ?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 이 만주신문 기사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후에 제시할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하나 더 미혼자가 포함 돼 있었다. 박정희는 당시 기혼자였다.

 

만주신문 기사에서 확실하게 알아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혈서는' 2번째 ' 로 박정희가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1번째로 보낸 편지는 무엇일까요 ? 바로 1938년 10월 만주군관학교 1차 지원 모집때 박정희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응모를 한 것이 1차 지원편지입니다. 박정희는 이에 나이와 군적이 안 돼 떨어졌고 2번째로 혈서를 통해 " 제가 이렇게 충성을 다하고있으니 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 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존 조작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A : 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은 39년 2월인데 어떻게 박정희가 혈서를 3월 29일에 보냈다는 말인가 즉, 혈서는 거짓이다] 라는 주장을 단번에 반박하는 것입니다. 사실 A 주장은 만주신문 내용을 읽으면 금방 반박이 되는 부분인데 말이죠.

 

이것은 http://www.ytn.co.kr/_ln/0103_200911051645599201 당시 언론보도에도 잘 나와있습니다 [

기사에는 "박 전 대통령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자 39년 재차 응모하며'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이라는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와 함께 제출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 이해하실 분이 계실 수 있으실텐데 박정희가 2번째로 보낸 편지는 만주군관학교 2차 지원에 대해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1차 지원 탈락을 재고해주고 이왕이면 나를 받아주라는 요청의 편지입니다.

 

▼ 은 박정희의 비서였던 이낙선씨가 1962년도에 정리한 비망록 중 한 내용입니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이 신문을 보고서 姜(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와의 상면은 만주의 여관에서였다. 그로부터 강은 박의 引導人(인도인)이 되었고, 강은 당시 시험관이었다. 강-울산인>

 

이것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혈서건을 풀어주는 중요한 실마리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조갑게 기사에 나와있듯 박정희를 후원하는 강대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 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를 뒤에서 후원한 사람은 강재호라는 만주국 대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재호는 간도특설대 출신)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자료를 접하고 이런 사실을 알 수 있겠군요. 1) 박정희는 1차 지원에 응모하였지만 탈락하였고 2) 탈락을 재고해주고 제발 저를 군관학교에 채용 (합격) 해달라는 혈서를 써 편지에 담아 보냈으며 3) 이 편지가 만주신문에 보도됐고 4) 이것을 본 조선인 출신 간도특설대 만주국 대위 강재호는 감동을 받고 4) 후에 박정희의 후원자가 됐으며 5) 이 강재호는 시험감독관이었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牧丹江)성에 있는 만주군 6관구 사령부內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李再起(이재기·작고·육군 대령 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 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고시 합격자 공보’가 실렸다. 박정희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李翰林(이한림·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7) 강재호 대위는 당시 시험감독관이었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박정희를 시험장에 데려와 시험을 보게 하였고 박정희는 우수한 성적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다.

 

3. 유증선 증언 시간등의 착각 ?


만주신문을 보면 박정희는 39년 3월에 혈서를 썼지만 유증선씨는 38년 5월로 생각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39년 그 이후 60여년이 지나 조갑제가 찾아와 이에 대한 인터뷰 요청을 하니 기억이 흐릿해진 착각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유증선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실제로 유증선이 증언한 것처럼 만주신문에 났다는 박정희의 혈서기사가 발견이 됐구요. 유증선의 증언과 비슷한 대목인 이낙선씨의 비망록도 있습니다. 유증선씨는 혈서 내용으로 진충보국 멸사봉공을 증언하였는데 진충보국 없었지만 멸사봉공 (滅私奉公)은 있었으며 흔히 진충보국 멸사봉공을 동시에 사용하니 이에 햇갈린 것으로 보입니다. 

 

4. 만주신문은 1939년 이전에 폐간됐다 ? 


이것 또한 이미 반박된 지가 아주 오래전인데 자꾸 인터넷에서 퍼지던 모양이더군요. http://rnavi.ndl.go.jp/research_guide/entry/theme-asia-49.php 일본국회도서관입니다. 

05.jpg

(구글크롬으로 번역한....)

 

만주신문은 분명 38년 ~ 44년 사이 존재했습니다. 근데 어째서 폐간설이 나왔냐면 초기 만주신문이 아니라 만주일보라고 말했었는데 이 만주일보는 3개가 있었고 각각 하나는 1907년 하나는 08년 하나는 35년에 폐간됐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혈서기사가 있는 만주신문의 YB-628이 발견되고 만주신문으로 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신문 폐간드립을 치는 것은 혈서사건의 본질 또한 흐리는 멍청한 짓입니다.

 

5. 만주군관합격 발표일은 39년 2월인데 박정희가 3월 29일에 혈서를 썼다니 말도 안 된다 ?


이것은 만주신문 기사를 제대로 보지않은 무지에서 온 발언입니다 2. 를 잘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면 [39년 2월 합격자발표는 1차 발표이고 박정희는 여기에 탈락했고 1차 지원에 탈락했지만 난 이렇게 충성을 하고있으니 제발 합격해달라는 혈서가 담긴 편지를 보냈고 이게 만주신문에 나 강재호 대위가 감동을 받아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됐으며 강재호 대위는 2차 입학시험때 박정희를 데려와 시험을 치루게 했고 박정희는 우수한 성적으로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6.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서 교련을 이수해 하사관 자격이 부여 돼 군적자격이 있어 나이불문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지원이 가능하였다 ?


이런 주장을 최초로 한 사람은 이글루스의 진명행이라는 사람인데 (2009년 8월경) 당시 글에서 대구사범학교에서 교련을 이수하면 어떠한 식으로 하사관 자격이 부여 돼 군적자격이 생기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으며 혈서건이 터지고는 대구사범학교에서 교련을 이수하면 하사관 자격이 부여된다는 글을 삭제했습니다. 후에 진명행 이글루스를 탐방하다 어떤 사람이 나는 박정희가 하사관 자격 (군적)이 있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라고 보는데 그 글이 삭제됐다고 묻자 진명행은 답글로 다시 조사해 본 결과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삭제했다고 답변한 것을 분명 봤었는데 

 

65.jpg

 

 

 " .. 자료가 부족하여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연결고리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가설 정립이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내렸습니다 ... "

 

하사관 군적설을 주장하던 사람이 이 설을 포기하고 글을 내렸는데 인터넷에서는 언제까지 하사관 군적설이 퍼질 생각인지 ? ; 

 

7.  그 외 조작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


주로 이들은 진명행이라는 이글루스의 블로거 글을 기반으로 박정희의 혈서가 조작됐느니 주장을 하는데 

 

(이들의 주장은 2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첫번째. 박정희의 혈서기사가 있는 만주신문에서는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 에 박정희가 혈서를 보냈다고 하는데 당시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에는 징모과(徵募課) 가 없었으며 

 

두번째. 만주신문에서는 박정희가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읽었다고 하는데 박정희가 혈서를 보냈다는 3월 이전에는 일계 학생은 뽑지도 않았고 만계 학생들만 선발하였고 일계 군관모집요강은 39년 12월에나 최초로 나왔다. 

 

 이 주장은 단번에 반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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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811020020920102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8-11-02&officeId=00020&pageNo=1&printNo=6176&publishType=00020 1938년 11월 2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조선인을 상대로 만주국군 육사군사과생을 모집하는데 확실하게 <일계> 가 써져있습니다. 즉, 39년 12월에나 일계 군관모집요강이 나왔다는 것은 거짓말로 밝혀졌으며 38년 부터 조선인들은 만주군관학교에 일계로 지원이 가능했고 신문에 나와있듯 잘 알고있었고 박정희가 일계로 지원한 것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작론자들은 단호하게 아니다를 외치고 있으니 웃깁니다.

 

지원자는 [치안부에 신입하라] 고 나와있습니다. 박정희의 혈서기사가 있는 만주신문과 내용이 일치합니다. 즉 치안부는 분명히 존재했으며 또한 동아일보 기사에 써져있는 입학자격도 만주신문에 나와있는 입학자격과 일치합니다. 

 

또한 징모과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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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7월 25일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일본 육군성이 육군 제도를 개편하였는데 강덕 4년 (1937년) 에 생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치안부도 일본 육군성의 제도를 벤치마킹 했을 확률이 매우 큽니다

 

기사 밑부분을 보십시오 [... 현제 군무국의 징모과도 인사국에 옮긴다 .. ] 그렇다면 진명행씨가 직접 치안부 군정사 소속 부서라면 내놓은 이 자료 그러면서 여기에 당당히 징모과는 없다며 제시한 이 자료 

 

 

- 軍務課(編制、預算、補充、補給、計劃、憲兵事項,軍紀事項);

人事課(人事、恩賞、功績、指紋)

- 主計課(會計、預算、金錢出納)

- 經營課(需用、調辦、建築);

- 兵馬課(兵器、馬匹、獸醫)

- 醫務課(醫療、衛生)

- 法務課(法務、審判)

- 艦政課(見前)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었고 육군성의 당시 개편제도 그리고 치안부가 강덕 4년인 1937년도에 생긴 것을 보면 빨간줄로 쳐놓은 인사과에 징모과가 들어갔을 (혹은 합쳐지거나 흡수되는 형태) 확률이 매우 큽니다. 즉,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에 지원을 했다는 기사는 전혀 틀린 말도 아니며 유령부서도 아닙니다.


뭣보다, 박정희의 혈서설은 그의 동료인 유증선씨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증언 그리고 이낙선씨의 비망록에 있는 강재호 씨의 감탄 그리고 이를 다 입증해주는 혈서기사가 확실히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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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국회도서관에는 청구 기호 YB-628 번호에 박 전 대통령의 혈서기사가 저장 돼 있다http://opac.ndl.go.jp/recordid/000000105606/jp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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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면 YB-628 이라는 청구기호로 저장된 마이크로 필름화된 당시 신문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 故 박정희 前 대통령 혈서는 존재하는 가 ? |작성자 why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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