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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의 스승
게시물ID : humordata_17529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흙향기
추천 : 3
조회수 : 181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5/22 19: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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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며칠 후 성왕은 신하들과 함께 역시 별빛 없는 캄캄한 흐린 날 밤에 무릉동에 왔다. “, 무지개다. 무지개가 언덕에 색동옷처럼 걸쳐 있다.” 신하들의 함성에 놀란 성왕이 보니 동굴이 있는 언덕 위를 영롱한 무지개가 그린 듯 감싸고 있다. “, 꿈의 무지개!” 시를 읊듯 조용히 입을 연 성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 대왕.” 그는 신하들을 뒤에 두고 동굴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후 거대한 구렁이가 입구로 기어 나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번과는 다르게 눈빛이 인자하고 색깔이 누르스름하다. “확실히 구렁이가 순해진 것 같군. 게다가 노랗게 염색까지 해서 보기도 좋아.”

조금 마음이 놓인 성왕이 한 걸음 더 접근하자 신하들이 아우성을 친다. “대왕마마, 가까이 가지 마소서. 물려 죽습니다.” 신하들의 아우성에 화들짝 놀란 성왕. “으악! 대왕 살려!” 비명과 함께 겁에 질린 얼굴을 돌리고 신하들 곁으로 도망 나왔다.

 

배를 타고 웅진성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든 성왕의 꿈에 다시 무령왕이 나타나 꾸짖는다. “이 아비가 나라의 안녕을 위하여 뱀의 몸을 빌렸는데 후왕은 어찌하여 나를 피하는 것이오?”

아바마마. 이무기의 몸을 빌리신 것을 소자가 어떻게 알 수 있겠사옵니까?”

허허. 의심이 많군. 동굴 위 언덕에 걸친 무지개를 보시오.”

, 그 무지개 말이옵니까?”

그렇소. 천상의 존재들은 무지개를 타고 이승과 저승을 오갑니다.”

, 그러셨군요.”

 

조금 있으려니 다소 화가 풀린 무령왕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핏줄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하지 않소? 후왕이 나를 껴안아서 부자간의 인륜을 보여야 하늘도 감동하여 내가 용이 될 수 있어요.”

죄송하옵니다. 아까는 신하들의 비명에 놀라 엉겁결에 도망쳤습니다. 이번에는 혼자 가서 꼭 아바마마를 껴안겠습니다.”

고맙소. 후왕. 하나 조심할 것은 내가 용이 된 모습을 절대로 보지 마시오.”

. 알겠습니다.”

또한 반드시 해가 뜨기 전에 나를 안아야 합니다.”

그건 왜 그러한가요?”

용이 되기 전에 해가 뜬다면 동굴에 오랫동안 있던 나의 몸이 굳어 돌이 되어 버릴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아바마마.”

 

사비성으로 떠날 날은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군.” 칠일 후 별빛 한 점 없어 칠흑같이 어둡고 흐린 날 밤. 이번에는 홀로 동굴로 출발하였다. 역시 오늘도 언덕 위에 희망의 무지개가 어두운 밤하늘에 찬란한 빛을 자랑하고 있다. “선왕께서 확실히 저승에서 이곳으로 오신 모양이군.” 동굴 입구에서 주저하고 있는데 거대한 뱀이 기어 나온다. “과연 저 징그러운 뱀이 아바마마일까.”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한 성왕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자 코앞까지 다가온 구렁이가 성왕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린다. “냉혈동물 구렁이가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다니!”

그가 어이없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구렁이 역시 강렬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응시한다. 무엇인가 재촉하는 듯하다. 하지만 구렁이의 눈길에 마취되어 한없이 빨려드는 개구리가 되어버린 느낌. 그는 굳어버린 듯 더 이상 꼼짝달싹할 수 없다. “아무리 저 괴물이 아바마마라고 하지만 너무나 징그러운데 어떻게 안을 수 있단 말인가.”

 

잠시 후 동쪽하늘에 붉은 빛이 감돌더니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성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이 급해진다. 태양이 떠오르면 구렁이는 돌로 변해버릴 것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저 구렁이는 분명 뱀의 몸을 빌린 선왕이야. 얼른 용기를 내야지.”

성왕이 마침내 구렁이를 향해 몸을 내밀자 다가온 구렁이는 그의 몸을 칭칭 감는다. 그는 구렁이의 차가운 체온을 느끼면서 체념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랬더니 구렁이는 날름거리는 혀로 그의 얼굴을 비비다가 입술을 마주 포갰다. “으악!”

 

그 찰나 해가 떠오르고 냄새를 피우며 무겁게 짓누르던 구렁이는 어디가고 없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 콰르르르릉! ! !”

천둥 속에서 무령왕의 장엄한 음성이 들려왔다. “승천하는 용을 보지 마시오. 보게 되면 후왕과 백제국에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이오.” “! 콰르르르릉! !” 엎드려 있다가 천둥벼락에 놀란 성왕. 그만 선왕의 충고를 잊고 엉겁결에 하늘을 보게 되었다.

~~~! ~~~!”

천둥번개와 함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면서 청벽부근 강물에서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솟구쳐 올라온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도저히 앞을 볼 수 없다. “~ 용이 하늘에 올라간다.” 그러나 머리는 볼 수 없고 꼬리만 꼬물꼬물 허공을 휘저으면서 하늘로 치솟는다. 곧이어 청벽 언덕 위에 황홀한 무지개가 오색찬란하게 걸친다.

 

그때 연보라 빛이 하늘을 가르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신이 놀란 목소리로 후왕에게 다급히 외쳤다. “아니, 후왕께선 왜 대왕의 말씀을 어기시나요?”

내가 무엇을 어겼답니까?”

무령대왕께서 자신이 용이 되시는 모습을 보지 말라고 후왕께 신신당부하셨을 텐데요.”

그것을 조금 쳐다본 것이 큰 잘못입니까?”

세상의 모든 중요한 일은 항상 비밀이 있는 법이랍니다. 더구나 천상의 존재이신 무령 대왕이 하시는 일인데요.”

그것이 여신이 달려오신 이유라도 되나요?”

. 후왕이 보셨으니 천기가 조금 어그러졌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비하여야 하니 어서 고개를 돌려주세요.”

알았소.”

이번엔 쳐다보시면 절대 안 됩니다.”

 

그래도 후왕이 호기심에 몰래 훔쳐보니 여신은 하늘을 향해 팔을 뻗치더니 주문을 외웠다. “아함 크롬 마니 옴! 아함 크롬 마니 옴! 수리수리 사바! 일월성신의 뜻을 받들어 나의 이름으로 바라노니 나의 큰곰자리 별자리의 별들이여! 대왕별자리의 별들이여 모두 모두 나에게 오소서.”

그러자 여신의 손에서 연보라 빛줄기가 높이 솟구치더니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린다. 큰곰자리 대왕별자리의 별들이 우수수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황금빛 수정 자루에 끌어온 별들을 퍼 담고 후왕에게 말을 했다. “후왕, 이것은 이 세상 모든 물건들을 다 담을 수 있는 자루입니다. 여기에 선왕과 저의 별들을 담아 놓았어요.”

여신, 이것을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후왕, 이 자루를 침소에 감추어 놓으셨으면 해요.”

거기에 놓았다가 나중에 어떡하시렵니까?”

나중에 불가피한 일이 발생하면 별을 타고 하늘에 오를 것입니다.”

이거 완전히 여신을 위한 비상용품 아닙니까?”

호호호! 그러고 보니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이 별들의 상서로운 기운이 후왕을 잘 지켜 줄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여신.”

별들을 담아 놓은 자루를 그곳에 숨겼다는 것을 절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세요.”

걱정 마시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은 언제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누구도 모른다. 백제를 위한 여신의 이런 자상한 계획이 나중에 오히려 발목을 잡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무릉동 동굴에서 돌아온 성왕은 며칠 후 사비성으로 천도를 강행(538)한다. 사비성 주변은 넓은 평야와 함께 풍광이 좋아 나름대로 만족이 되었다. 나라이름을 남부여라 하고 웅진에서부터 꾸준히 관심 가져온 불교와 아기자기한 그림에도 더욱더 열정을 쏟았다. 중앙관부도 22부로 늘리고 담로제도도 개편하여 왕권강화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어느 정도 나라의 기틀이 다져지자 성왕은 왕자 창을 태자로 정하고 청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는 태자와 공주의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쏟게 되었다.

 

태자는 어려서부터 용감하여 열 살이 되자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타고난 무사의 기질을 보였다. 하지만 공주는 태자를 능가하여 여덟 살에 말을 잘 다루고 활은 물론 작다란 보검까지도 제법 잘 휘둘러 임금과 신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태자와 공주의 탁월한 실력에 임금은 어쩌다 태자와 함께 공주까지 사냥에 데리고 다녔다. 벌써 청소년기에 접어든 두 자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나란히 말머리를 같이 하고 사냥터를 누볐다. 공주는 오빠 태자처럼 융복(군복)에다가 바지를 입고 긴 가죽신을 신은 채 준마를 타고 달리며 고라니와 토끼를 잡았다. 사냥을 마치고 두 자녀가 모닥불을 피워 잡은 짐승의 고기를 굽는 것을 임금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이 나라 백제를 다스려나갈 사람들이다. 둘이 우애하여 이 아비의 뜻을 잘 이루어다오.”

 

그러자 태자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소자야 임금이 될 것이니 그렇다지만 공주는 임금이 될 수 없지 않사옵니까?”

그 말에 공주가 불쑥 말을 꺼냈다. “소녀가 여왕이 되면 어떻사옵니까?”

허허허! 백제엔 아직 여왕이 없었느니라. 우리 백제에서 그런 말 한 공주는 이제까지 없었지.”

허면 소녀의 남편이 될 사람을 양자로 받아 그의 왕비가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맹랑한 꿈 정말 야무지구나. 오빠와 한번 경쟁해 보겠다는 거냐?”

넌 안 돼. 되더라도 나이가 많은 나에게 양보해야 해.”

안 돼. 그럴 순 없어. 여인이라고 임금이 못 되면 정말 불공평한 것이야.”

귀엽기만 하던 너희들이 벌써 많이 컸구나. 이렇게 말다툼을 하는 태자와 공주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다가 문득 둘에게 제왕의 학문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임금의 머리에 떠올랐다. 제왕의 학문이라면 무엇이 좋을까? 사서오경은 이미 시작하였으니 이번엔 천문이 좋겠다. 더구나 천문박사는 태자와 공주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연희가 아닌가.

 

태자와 공주는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망해궁 별실에 앉아 한참 노닥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을 가르치게 될 스승에 대한 깊은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태자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바마마가 우리에게 붙여준 천문박사는 여인이라면서?”

그래. 중국 양나라에 조기유학 갔다 온 연씨 가문 출신이래.”

대비가 자기 가문 사람을 밀어 넣었나? 아무튼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기대가 된다. 안 그래, ?”

공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툴툴댔다. “난 별로 관심도 없는데, . 천문이나 잘 가르쳐 주려나 모르겠어.”

솔직히 나도 손에 닿지도 않는 먼 하늘의 별들보다는 별처럼 아름다운 궁궐의 여인들이 더 눈에 들어와.”

오빠마마도 진짜 한심해! 머릿속에 맨 여인네 생각뿐이니.”

너도 조금 더 있으면 이 오빠의 애틋한 심정을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 무슨 애틋한 심정. 그래도 아바마마께서 천문박사를 직접 불러 가르치라고 하신 걸 보니 뭔가 배울 것이 있나봐.”

내가 듣기엔 별들이 나라와 개인의 운명을 미리 보여준다고 해. 그래서 우리 왕실이 그걸 알게 되면 백성을 다스리는데 편리하다나.”

 

다음날 태자가 거처하는 태자궁의 별실 문을 곱고 고운 목소리가 살며시 두드렸다. “천문박사 연희, 태자마마와 공주마마를 뵈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보며 웃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오.” 그러자 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한 맑은 눈빛을 지닌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오.” 연희가 자리에 앉자 두 사람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 딱 멎었다. 치명적일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 특히 태자는 우두커니 연희만 바라보고 있다가 연희와 눈길을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공주에게 말했다. “우리 스승님 이 정도면 삼국 제일의 미인이겠어.”

그 말에 연희가 가볍게 홍조 띤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태자님은 솔직하셔서 좋습니다. 칭찬 정말 감사하오나 소신의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하여야 할 학문이 소중한 것이옵니다.”

 

연희의 부드러운 미소에 다시 정신이 나가있던 태자가 문득 깨어난 듯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로 연희의 유별난 옷과 모자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스승의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공주가 옆에서 살짝 눈을 흘기면서 태자를 쿡 찔렀다. “처음 보는 여인에게 나이 물어보는 것 실례야. 더구나 스승님인데.”

, 그게 어때서? 실례?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러면서 공주가 키득거리며 말을 넘겼다. “박사님, 태자께서 조금 실례한 일이니 마음 쓰지 마시고 넘어가 주시죠.”

소신도 뭐 아무렇지도 않사옵니다.”

왜 천문을 배우는 것입니까?”

천문은 임금의 학문입니다. 그러니 왕실에서 배워 익히고 활용하여야 하는 것이옵니다.”

꼭 딱딱한 천문공부를 하여야 합니까?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 주시죠. 특히 스승님 첫사랑 이야기라면 더욱 좋겠소.” 그 말에 연희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명을 받들었으니 반드시 천문을 공부하여야 합니다. 내일부터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연희가 나가는 것을 황홀한 눈길로 바라보던 태자가 아쉬운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다운 별처럼 생긴 여인이야.”

오빠마마도 못 말려요. 아니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쓰시다니요? 그래서 이 나라의 훌륭한 임금이 되실 수 있겠어요?”

내가 천문을 잘 몰라도 박사가 옆에서 나를 도와주면 되지 않겠어?”

 

다음날. 어제보다 배가 조금 불룩해 보이는 성복을 걸친 연희가 유쾌한 표정을 던지며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태자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짓궂게 말했다. “사부! 어째 오늘은 배 모양이 이상하네요. 혹시 그 안에 아기별이 계신 겁니까?”

그러자 연희가 태연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그랬으면 소신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양나라 때부터 아직 혼자랍니다.” 태자가 머쓱해서 뒷머리를 만지고 있자 연희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따라하세요.” 팔을 높이 쳐들고 손가락을 움켜쥔 동작으로 머리를 까닥거리면서 발을 구르며 꾀꼬리보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그러자 참다못한 태자가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장난하는 거요? 다 큰 사람들더러 재롱을 피우라니.”

하지만 연희가 여전히 율동을 하면서 빙글빙글 웃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별을 아름답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이 공부의 기본이옵니다.”

누가 별보고 보기 싫다고 했소?”

무슨 공부든지 재미있게 하여야 합니다. 특히 천문을 공부하려면 별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절대로 필요하옵니다.” 속으로는 어이가 없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으나 마땅히 따질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희가 반짝이는 성운이 아로새겨진 성복의 불룩한 호주머니를 뒤지더니 여러 가지 색깔의 별사탕을 꺼내 놓았다. “이거 소신이 양나라에서 가져온 귀한 사탕인데. 한번 먹어보세요. 정말 맛있답니다.” 더욱 기가 막힌 태자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이제는 우리를 군것질 좋아하는 아이 취급하는군.”

말을 잘 듣는 공주가 아무 것이나 하나 집어 먹으려고 하자 연희가 말렸다. “잠깐. 푸른 별, 노란 별, 붉은 별 순서대로 사탕을 먹어야 합니다.” 공주가 그대로 따라 얌전히 사탕을 핥아먹고 있으려니 옆에서 태자가 사탕을 우걱우걱 씹으며 볼멘 목소리로 묻는다. “사탕 먹는데도 왜 순서가 있어야 하는 거요?”

태자마마. 모든 별은 태어났을 때 푸른빛을 띠다가 오랜 세월이 감에 따라 노란빛을 띠게 되고 나중에는 붉은 빛을 보이게 되옵니다.”

 

며칠 후 태자궁. 천문수업 시간이 되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성복을 입은 사부의 가슴이 더욱 불룩하기만 하다. 그곳으로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태자가 허공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연희가 아련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구년 전, 소신이 열네 살이 되어 양나라에 조기유학하고 있을 때입니다.” 연희는 잠시 말을 끊고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 태자가 사부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았다. 정말 이상하다. 볼록한 가슴 위 성복으로 자꾸만 물기가 비치면서 축축이 젖어오는 것이다. ‘이거 처녀가 갑자기 애를 낳았나. 웬 젖몸살로 사부의 가슴에서 젖이 새어나오고 있는 걸까.’ 그러다가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치면서 불길이 일었다. ‘여전히 딴청을 부리고 있군.’ 차마 말은 못해도 그녀의 냉랭한 눈빛은 이렇게 꾸짖는 것 같았다.

 

무안해진 태자는 얼른 고개를 돌리면서 혼자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잖아. 겉보기에는 동갑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그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그녀가 잔잔한 미소를 태자에게 보내며 나직이 말했다. “그 해(530) 가을에 혜성이 나타났었사옵니다.”

그 말에 태자가 스승을 골탕 먹이려는 생각으로 서슴지 않고 물었다. “혜성이 무엇이죠? 직접 눈으로 보여주시오.”

바로 이것이옵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연희가 벌떡 일어나 품속 호주머니에서 딱딱해 보이는 무엇인가를 꺼내어 태자에게 던졌다. “!” “!” 얼음덩어리를 가슴에 정면으로 얻어맞은 태자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선 공주가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킬킬거렸다. 잠시 후 연희를 바라본 태자는 그제야 사부의 가슴이 갑자기 줄어든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철저한 실험실습을 위하여 연희가 품속 호주머니에 넣고 온 얼음덩어리가 서서히 녹아들다가 단단한 그 모습을 태자에게 호되게 나타나 보인 것이다. 연희가 이야기해 준 혜성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530925일 칼 세이건.앤 드루얀 저/김혜원 역, 혜성, ()해냄출판사, 2003, 461 핼리 혜성의 근일점 통과

 

희롱을 일삼던 태자가 조용해지고 학습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연희가 두 사람에게 공손히 물었다. “이런 얼음덩어리인 혜성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그 말에 공주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대답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겠죠.”

바로 그겁니다. 혜성이 물이 되어 지구상에 비가 많이 오고 그 다음엔 대기 중에서의 습기가 말라 가뭄이 자주 발생하며 한파가 발생하게 되옵니다.”

 

그 말에 공주가 호기심이 어린 눈길로 물었다. “혜성이 와서 발생하는 것 더 없나요?” 그러자 연희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즉시 말을 꺼냈다. “빠트릴 뻔했군요. 지진까지도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자 태자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땅이 얼음덩어리에 맞아서 갈라지는 것이오? 내가 사부에게 맞아 가슴에 멍이 든 것처럼.”

아니옵니다. 혜성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던 강력한 우주공간의 인력이 지각을 끌어당겨 지진이 일어난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때 바닷물을 세게 끌어당겨서 비가 많이 오는 것이기도 하옵니다.”

혜성은 우리 백제에서만 볼 수 있소?”

아니옵니다. 혜성은 온 세상에서 모두 보이는 것이므로 그 영향이 일식처럼 일부의 지역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넓은 지역에 널리 끼쳐지는 것이옵니다.”

 

헌데 혜성이 천문에서 그렇게 중요한 까닭은 무엇이오?”

혜성의 출현은 현재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새로운 세상이 찾아온다면 그 이전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지는 법, 혹시 나라에 끔찍한 전란이나 재난이 발생하는 것 아니오?”

모든 나라가 그런 것은 아니옵고 세상을 주도하는 곳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옵니다.”

어떻게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오?”

그것은 혜성의 밝기나 색깔, 나타난 계절과 꼬리방향과 길이, 나타난 기간에 따라 다르옵니다. 즉 밝을수록, 기간이 길수록 재앙의 영향이 커지고, 푸르고 붉고 흰 것은 대개 전란이 찾아오고 검은 혜성은 큰 홍수가 일어납니다. 또 계절로 보자면

그만! 그만! 너무 복잡하면 머리가 헷갈려 알던 것도 잊어버리겠소. ! 그렇다면 피해도 지역마다 그 차이가 다르겠군.”

 

그러자 연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하다는 눈길로 태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분명 그럴 것이옵니다. 또한 전쟁이나 재난이 아니더라고 종교의 움직임도 그 변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옳은 말이오. 신라에서 이차돈이 순교한 이후 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숭배하여 신라는 물론 우리 백제에서도 수많은 절들이 세워졌소.”

지금 십년 전에 찾아온 혜성이 보여주는 세상의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항상 참담한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옵니다.”

무슨 좋은 변화라도 생기는 것이오?”

. 극심한 혼란이 지나간 후 나라를 다스리는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고, 과거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여 발전을 지향하는 획기적인 혁신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옵니다.”

난 세상이 아무리 좋아진다고 해도 지금 이 안정된 상태가 좋아. 태자의 신분에다가 임금이 될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이 행복감.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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