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절을 맞아 올라온 집에서 며칠을 보내고, 굉장히 좋지 못한 최악의 명절을 겪은 후
술을 마시고, 홍대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돌아온 길에 나는 일부러 말했다.
"별빛마을 8단지 말고요. 9단지 근린공원 입구에서 세워주세요."
원래 행선지와는 다른 나의 요구에 기사는 조금 의아해 했으나 곧 별로 물어보지 않고
알겠다고 한 뒤 나를 그곳에 세워주었다.
나는 근린공원 입구에 내려 중고등학교때에 근처 보습학원이며 수학학원에서 집에가던
나날을 떠올리고, 가끔 무서운 형들을 만나 고초를 겪은 일이라던가 이소라의 음악도시를 들으며
고래와 함께 하늘바다를 헤엄치던 추억 등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면 이소라는 참 웃음이 많았다. 한번 웃음이 터지면 자신도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어댔는데 나는 그 웃음이 참 좋았다.
나는 집까지 가는 길에 내가 처음 운전연습을 했던 길과 매일 아침 마지못해 학교가던 길들을 걸었다.
보험 외판원에게 잡혀 어린 내가 부모님을 통해 보험을 들라고 강매당할뻔했던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쳤고
나름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여자아이에게 고백했다 망신당한 그 가로수길도 온전히 보았다.
혹은 그보다 더 전에,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아파트에 산다는 기쁨에 들떠 맥없이 걸었던 계단과 이제는
없는 모래바닥에서 땅을파며 놀았던 그 놀이터를 지났다가 우리들만의 아지트라며 쓰레기통같은걸로
만들었던 자리에는 이제 없는 자동음식물 분쇄기등이 있는걸 보며,
응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가워. 고마웠어. 자주 못 볼 도시풍경아. 내 추억아.
그치만 너 좀 심했어.
실은 너에 대해 좋은 추억만 있는 건 아냐.
나는 때로 무섭고 아픈 기억에 높다랗게 서 있는 아파트를 보며 마치 그곳이 가면 안될 곳 처럼 느껴지던
적도 있었지만 백번 양보해서 말하길 그정도는 누구나 겪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심했다고 한 말도 미안해. 하지만 다시 보기는...
2.
원래 집에서 정착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 집주인에겐 좀 미안하지만 계약 종료가 아니라 연장을 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3년? 4년? 아니면 그보다 좀 더 오래.
3.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무신경한 사람이였고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였다.
나는 동생이 생각보다 일찍 결혼해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해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4.
나는 뒷짐을 지고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를 벗삼아 눈을 감다가
잠깐 눈을 떴다가 가끔은 내 옆에 누군가 있어도 좋고, 없더라도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집에 가다 나이스마트에 들러 돼지고기와 파를 사다 맛있는 제육볶음을 해 먹고 베토벤 크로이처 9악장에
빠진채 음악을 듣다 말로의 블루스 인 더 나이트를 듣고 다가오는 다음주에 대한 원망과 함께
조용히 일을 하다 조용히 퇴근하고 뭐 그런종류의 삶을 즐겨도 괜찮을 것 같다.
5.
공공연하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글을 업로드하다 말고 미완성으로 남긴 채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그렇다치고 내가 20층 아래로 떨어져 죽어도 별로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빚이 한 200만원 쯤 있는데 그거야 보험금에서 대충 만까이 될 거고 어차피 누구에게든 실망만 안겨줄
삶이라면 빨리 정리하고 다음생을 노리던지 영원히 우주를 여행하는 그런 정도의 삶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죽음을 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살아있어봐야 별로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혹자는 때로, 쓸모없는 인간이 없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좀 다르다.
어차피 도움이 못되는 인간이라면 특히 나라면, 민폐만 끼쳐봐야 별로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없어져주는게 장기적인 집값변동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정리하는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6.
누군가 날 안아주며 괜찮다고 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말을 인용하자면,
'힘들다고 생각하고 결과를 못만들어 내는 건 다 게으름이고 약한놈들이나 하는 말' 이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며 때로 찾아오는 그리움과 향수병에 몸서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불과했다.
그래서 누가 날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은, 그냥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아.
누가 안아줬으면 좋겠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별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진지하게 20층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을 고려해본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7.
실은 그럴 생각은 없다.
없나?
아니아니. 진짜로.
나 정말 고민중이다.
8.
용기를 내어 내가 혼자 살며 겪었던 힘들었던 일들에 관한 것을 가족에게 위로받고자 말을 꺼낸 자리에서 아버지는
시험 합격도 못한 돌대가리가 뻔히 당하는 일이 그딴것들 뿐이라고 했다.
아 씹 생각해보니까 또 빡치네.
9.
생각해보니까, 자살은 둘째치고 그냥 혼자 살아야겠다.
못참겠다.
10.
그래도 여러분은 행복하세요, 진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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