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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남자 이야기(전편)
게시물ID : humordata_18139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ahh
추천 : 3
조회수 : 329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9/05/07 11: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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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80년대 중후반 쯤이었어, 여름 방학 마치고 2학기가 되니 수업시간에 복학한 선배들이 몇 보였어. 아, 참... 얘기하기 전에 부탁 하나, 여성 분들겐 조금 불쾌할 수 있는 얘기야. 예전엔 그랬구나 정도로 생각해주면 고맙겠다.
 
난, 이 복학한 선배들과 친하게 지냈어. 하루가 멀다하고 술 마시러 다녔지. 그 중 만수 형이란 분이 있었어. 그래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야.
 
이 형에겐 00은행에 다니는 여친이 있었는데, 회사마치면 한 번씩 학교로 만수 형을 보러 오곤 했었어. 그때마다 형은 광식이와 나를 여친과 함께하는 저녁식사 자리에 데려 갔었지.
 
희한한 게, 이 형은 여친에게 꼭 존댓말을 쓰더라는 거야.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뭘 드시겠소."
"이 집은 닭똥집 튀김이 맛있소. 드셔보시겠소."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만수 형은 종손가의 장손이었고, 가풍 때문인지 여성들에게 꼭 존대를 한다더군. 아무튼, 이 형은 후배든, 동기든 가리지 않고 여성에겐 늘 존칭을 썼어.
 
어느 날이었어. 점심 먹으러 학교 앞 식당을 갔는데, 거기서 만수 형과 광식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거야.

자연스레 합석했지. 두 사람 대화 내용을 가만 들어보니, 광식이가 사귀는 여친과 대판 싸운 모양이었고, 그 광경을 또 만수 형이 본 거라. 그래서 식이를 달래려 낮술을 마시는 거였어.
 
막걸리가 몇 순배 돌자 만수 형이 광식를 보며 근엄한 소리로 말하는 거라.
 
"광식아, 니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남자가 누군지 아나?"
 
고개를 푹 숙인 광식이 암 말 없자 내가 대뜸 물었지.
 
"누군데요?"
 
그러니 선배가 담배를 한 대 빼 물고 불을 탁 붙이며 말하는 거야.
 
"여자와 싸우는 넘이야"
 
형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여자와 싸우는 남자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얼간이 중 상 얼간인지, 천하에 못난 놈인지 열변을 토했지. 묵묵히 듣고 있던 광식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뜸 묻는 거야.
 
"그라믄 우짜면 되는데예, 남자가 무조건 참으란 말입니까. 화가 나도..."
 
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마신 후 만수 형이 말한 그 여덟자가 아직도 생생해.
 
 
 
 
 
"점/잖/게/타/일/러/야/지"
 
 
 
 
 
시박, 점잖게 타일러야지...라니, 말인즉슨, 여자가 잘 못하면 조용히 타이르면 되지, 사내자식이 면 끄슬리게 바보같이 여자와 싸우냐는 거였어. 여자와 싸우는 짓은 쌍것들이나 하는 행동이지 뼈대 있는 가문의 남자가 할 짓거리가 아니라는 거야.
 
그러면서 광식이와 성이 같은 선배는, 파가 어디냐, 몇 대손이냐며 족보를 따졌고 그럼 양반가문의 자손인데 백주대낮에 여자와 싸워 가문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느냐며 일장 훈계를 늘어놓았지.
 
분명 말도 안되는 얘긴데 광식이와 난 묘하게 빠져들고 있었어. 선배의 얘기를 계속 듣다보니 정말이지 여자와 싸우는 사내는 죄다 찌질하게 생각되는 거였어.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지, 만수 형 말 듣고 점잖게 타이르다 그야말로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았던 적이 많았으니. 
 
암튼, 난 1학년을 마치고 군엘 갔어.
내가 상병 달았을 때 만수 형은 사립학교 사회과 교사가 되었고 막 병장을 달았을 때 사귀던 여친이랑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말년휴가 때였어. 만수 형은 나와 광식이, 후배 몇몇을 불러 술을 사줬어. 엄청 마셨지. 닭집에 소주로 시작해서 2차 맥주집 3차 감자탕에 다시 소주... 원없이 달렸지.
 
11시가 넘어가자 후배들은 집에 가고, 갈 곳이라곤 냄새나는 자취방밖에 없는 광식이와 나만 남았지.
소주 몇잔 더하고 자리를 파하려는데, 아 글쎄 선배가 기어이 자기 집에 가서 한잔 더하자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아직 신혼이고 게다가 자정을 넘어가는 시간인데 가긴 어딜가.
 
택시를 타고 선배 집으로 갔어. 도착하니 자정이 넘더라고. 이제 형수가 된 이전의 선배 여친은 미안할 정도로 우릴 반겼어, 방 두 개 딸린, 좁은 거실 겸 부엌이 있는 아주 조그만 아파트였어.

거실 한 가운데 앉아마자 선배가 형수를 보며 그러더군.

“국수 끼리소”

국수 끼리소. 아~~~ 난 정말 살아오면서, 선배로부터 들은 두 개의 문장이 상남자가 내뱉을 수 있는 최고의 말이라 생각해.
 
‘점잖게 타일러야지’ ‘국수 끼리소’
 
대한민국 남자 중에 아내와 싸우지 않고 점잖게 타이를 수 있는 사람이 몇 있으며 자정 넘은 시간에 후배들 데려가 아내보고 국수 끓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주방은 분주해지기 시작했어. 형수는 싫은 내색이라곤 일절 없이, 늦은 시간 찾아 온 불청객들을 위해 국수를 끓이기 시작했어.

대충하는 게 아니었어. 멸치 육수 내고 계란 지단 부치고, 정구지 데치고... 광식이와 난 안절부절 했지. 있는 술에 대충 먹고 나오려 했는데, 일이 점점 커지는 거야. 이 야밤에 국수를 끓이다니.

소주 두어 병을 비우자, 형형색색 고명이 얹어진,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런 국수가 하얀 김을 내뿜으며 조그만 식탁에 올라오는 거야. 휘휘 저어 한 젓가락 가득 국수를 집어 삼키는데 갑자기 선배가 머리를 식탁에 쳐 박더니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는 거야. 뻗은 거였지. 나와 광식이는 당황했어. 안그래도 불편한 자리, 선배 성화에 못이겨 민폐를 끼치는데. 그 주역이 뻗어버렸으니.

광식이와 난 허급지급 국수를 다 먹고 신혼집을 도망치듯 빠져나왔지. 그런 우릴 보고 형수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택시비까지 챙겨 줬었어. 광식이와 난 자취방 가는 택시 안에서 두 가지를 다짐했었지. 형을 닮자, 형수 같은 아내를 얻자. 는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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