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유치환의 만년필
게시물ID : humordata_18188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리오의숲
추천 : 11
조회수 : 4421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9/06/10 06:21:51
유치환 선생님의 '행복' 이라는 시에 미쳐있던 작년 초여름 그의 감성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려고 부산 초량동에 있는 유치환의 우체통에 다녀왔더랬습니다. 거기서 봤던 좋은 글이 있어 소개 하고 싶어 이 곳에 올립니다. 

할빈에서 4,5백 리를 더 들어간다는 무슨 현(縣)이라는 데서 청마(靑馬) 유치환이 농장경영을 하다가 자금 문제인가 무슨 볼일이 생겨 서울을 왔던 길에 나를 만났다. 2,3일 후에 결과가 좋지 못한 채 청마는 도로 북만(北滿)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역두에는 유치환 내외분 그리고 몇몇 친구가 전송을 나왔다. 영하 40 몇 도의 북만(北滿)으로 돌아간다는 청마가 외투 한 벌 없는 양복 바람이다. 당자야 태연자약일지 모르나 곁에서 보는 내 심정이 편하지 못하다. 더구나 전송 나온 이 중에는 기름기 흐르는 낙타오바를 입은 이가 있었다. 내 외투를 벗어주면 그만이다. 내 잠재의식은 몇 번이고 내 외투를 내가 벗기는 기분이다. 그런데 정작 미안한 일은 나도 외투란 것을 입지 않았다. 
기차 떠날 시간이 가까웠다. 내 전신을 둘러보아야 청마에게 줄 아무것도 내겐 없고, 포켓에 꽂힌 만년필 하나가 손에 만져질 뿐이다. 내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불란서제 콩쿠링. 요즘 파카니 오터맨 따위는 명함도 못 들여놓을 초고급 만년필이다. 당시 6원(圓) 하는 이 만년필은 일본 안에서도 몇 자루 없다고 했다. 
“만년필 가졌나?”
 불쑥 묻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청마는 제 주머니에서 흰 촉이 달린 조작 만년필을 끄집어내어 나를 준다.  그것을 받아서 내 주머니에 꽂고 콩쿠링을 청마 손에 쥐어 주었다. 만년필은 외투도 방한구도 아니건만 그때 내 심정으로는 내가 입은 외투 한 벌을 청마에게 입혀 보낸다는 기분이었다. 
5, 6년 후에 할빈에서 청마를 만났을 때 청마가 그 만년필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튜브가 상해서 잉크를 찍어 쓴단 말을 듣고 서울서 고쳐 우편으로 보낸다고 약속하고 콩쿠링을 내가 다시 받아오게 되었다. 튜브를 갈아 넣은 지 얼마 안 되어 그 콩쿠링을 소매치기가 채 갔다. 
아마 한국에 한 자루밖에 없을 그 청자색(靑瓷色) 콩쿠링 만년필이 혹시 눈에 띄지나 않나 하고 만년필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쑥스럽게 들여다보고 또 보고 한다. 

[출처] 외투--김소운 [小珍박기옥]|작성자 열성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