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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술을 3잔 이상 마시지 못했던 신하들의 이야기.jpg
게시물ID : humordata_19554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가가
추천 : 14
조회수 : 2679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22/07/05 22: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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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필원잡기, 오산설림초고, 승정원일기를 읽고 직접 만든 자료입니다. 특히 이 내용들은 야사(야한사진 아님 ㅈㅅ) 위주로 만들었습니다.


 


윤회의 술마시기 좋아하는 결점을 책망하다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14일 기묘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209014_002 - 임금이 윤회를 불러 책망하기를, "너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술마시기를 도에 넘치게 하는 것이 너의 결점이다. 이제부터 양전(兩殿)에서 하사하는 술 이외에는 과음하지 말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윤회의 치죄를 아뢰었으나 허락치 않다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2월 22일 무자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212022_003 - (전략) 인하여 회에게 이르기를, "경이 술을 마시어 도를 지나치는 일이 한 차례가 아니었고, 내가 경에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이 임금의 명령에 대하여는 물이나 불 속을 들어가라 하여도 오히려 피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자기의 주량(酒量)을 생각하여 한두 잔쯤 마시든지, 반 잔쯤만 마신다면 그렇게 정신이 없고 체면을 잃게까지야 되겠는가. 이제부터는 부디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 따르지 않으면 죄를 받을 것이다.“


 


대동야승 / 필원잡기 / 필원잡기 제1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7A_0020_000_0010_2002_001_XML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公)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 되고 말았구나.” 하였다.


 


형조 판서 손순효가 군사 3천여 기로 건주 야인을 형벌주기를 아뢰다 (성종실록 122권, 성종 11년 10월 13일 기미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110013_002 - (전략) 전교하기를, "판서(判書)의 말은 선비의 궁색함을 면치 못한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하는데, 너무 취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대동야승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13A_0010_000_0010_2002_002_XML - 손순효가 찬성 겸 태학사(贊成兼太學士)가 되었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아껴 매우 중히 여겼다. 매양 그의 술마시기 좋아함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경은 이제부터 석 잔 이상을 마시지 말지어다.” 하니, 순효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나이다.” 하였다. 어느 날 승문원(承文院)에서 사대문서(事大文書)를 올렸는데, 임금이 그 표문(表文)이 좋지 아니함을 보시고 급히 대제학(大提學)을 불렀다. 사자(使者) 열 사람이 찾았으나, 순효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자주 용상에서 일어나 매우 간절히 기다리었다. 해 떨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순효가 비로소 입대했는데, 흩어진 머리를 거두어 올리지도 않았거니와, 술기가 만면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번에 하표문(賀表文)이 좋지 않아 경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자 하는데, 경이 이와 같이 취하였는가. 또 내 일찍이 경계하기를 술 마시지 말라고 하였고, 약속하기를 석 잔을 넘기지 말라 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그 말을 실천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딸자식이 있어 출가하였사온데,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지나는 길에 들렸더니, 만류하면서 술을 먹이는 까닭으로 감히 마지못하여 단지 석 잔만 기울이고 그만두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떤 그릇에 따랐는가.” 하니, “밥주발이라는 것으로 세 사발 마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취하였으니, 글을 지을 수 없지 않을까 염려되오. 제학(提學)을 불러다가 같이 지어 정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대답하기를, “제학을 번거롭게 하지 마옵소서. 신이 짓기를 끝맺겠사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신이 이미 지었사온데, 써야하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비록 묘하게 쓰지만, 부본(副本)을 술에 취해서 휘두르는 것은 불가하오. 모름지기 사자인(寫字人)을 쓰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순효가 억지를 써 아뢰기를, “신이 쓰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필연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순효가 서너 자루의 붓을 골라 손바닥에 그어 보더니, “모두 중 글자는 못쓰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연(御硯)을 거두어 주라 명하니, 그 가운데에서 새 붓 하나를 가져다 그어 보고, “이것은 쓸 만하다.” 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신은 늙었습니다. 상(牀)을 얻어 펴기를 원하옵니다.” 하자, 임금이 주도록 명하였다. 순효가 곧 부본에 나아가 쓰기 시작하여 다 쓰자, 붓대를 거꾸로 잡고 글 줄을 따라 한 차례 보더니 임금께 올렸다. 임금이 급히 받아보니, 글에 한 자도 버릴 것이 없고, 글자에 한 자도 고칠 것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서 곧 승문원에 돌린 다음 봉투에 싸서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사옹원에 명하여 연회 음식을 갖추라 하여 즐거이 놀 제, 순효에게 마음껏 먹도록 명하니, 마침내 대취하였다.


 


승정원일기 659책 (탈초본 36책) 영조 4년 4월 1일 신사 36/36 기사 http://sjw.history.go.kr/id/SJW-F04040010-03600 - 昔成宗朝名臣孫舜孝, 好飮酒, 成廟戒以無過三杯, 則舜孝別造一大盃, 日三引盃, 頹然而醉, 成廟聞之, 以欲戒酒, 而反勸酒爲敎矣。 옛날 성종조(成宗朝)의 명신 손순효(孫舜孝)가 술을 좋아하였는데, 성묘(成廟)께서 세 잔을 넘지 말라고 경계하니 손순효가 별도로 큰 잔 하나를 만들어 하루에 세 잔을 마시고서 취해 쓰러졌습니다. 성묘께서 듣고는 ‘술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 도리어 술을 권한 것이 되었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번역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U0_A04_04A_01A_00360_2017_084_XML

 

 

첫 번째 내용은 필원잡기 내용에 윤회와 남수문 두 명의 이야기가 같이 적혀져 있습니다.

 


두 번째 내용은 술 취한 손순효를 대신해 다른 사람이 글 쓰기를 희망했지만 손순효는 거절하였고 자신이 술 취한 와중에 완벽한 글을 써서 바치니 성종이 기뻐했다는 내용은 삭제했는데 그 이유는 너무 길어져서 저기까지만 끊었습니다.

 


세 번째 내용은 어디에 기록 되어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넣지 않을려고 했으나 이 이야기에 정철이 빠질 수가 없다고 생각 되어서 블로그나 뉴스 사설을 등을 읽으면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철의 후손들은 임금이 하사한 은잔을 어떻게 함부로 변형시킬 수 있냐면서 이것은 동인들의 모함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정철이 술 많이 마실려고 술잔 때려 팬 이야기는 거짓이 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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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huv.kr/pds116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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