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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그 여자 이야기.
게시물ID : love_406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철전열함
추천 : 22
조회수 : 3029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8/01/20 19:21:56
어느 늦가을 비오는 밤이었다.

"캬...이런 명작이...하루키는 하루키네..."

사실 내가 아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군대에서 더럽게 심심해서 읽은 "상실의 시대" 딱 하나였다.

나는 역사책을 좋아해서 소설도 역사소설이나 보는 편이라 소설쪽 지식은 전무하다시피 한 편이지만,
책이라면 해석본없는 불경도 글자 그대로 읽는 동생을 둔 지라, 
동생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댄스댄스댄스"를 그나마 아는 작가라고 빌려다가 집에 들고와서 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삿포로에 막 도착한 주인공이 돌핀호텔에 가는 길에 어느 커피집에 들러 위스키를 탄 진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자, 갑자기 커피가 미친듯이 마시고 싶어졌다.

빗발은 아직도 거셌고, 토요일 늦은 밤. 혼자 딸려고 소주를 디캔딩(...고추참치에다가 한잔하려고 뚜껑 따고 깜빡했음)한 상태였지만, 그 장면을 읽으니 커피가 너무나 마시고 싶어졌다. 



그러나, 여느 주택가, 그런 본격적인 커피집이 있을리 전무했다;;;
나는 커피집이 모퉁이마다 서너개씩은 있는사거리에 잠시 서서 고민 하다가, 두 잔만 더 마시면 아메리카노 한잔을 서비스로 마실 수 있는...그러니까 쿠폰을 조금만 더 모으면 되는 어느 커피집으로 들어갔다

"카페라떼...샷 두개 추가요."

주문하고서야 알았지만, 그 쿠폰들은 날짜가 지나 사용할 수 없는 쿠폰들이었다...빌어먹을 프렌차이즈...

여하튼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재생목록 중에 "뽕빨댄스모음"을 선택해서 쿵짝쿵짝 들으며 
이 가격이면 유럽 어디를 가도(봉사료 제외) 웨이터가 니 자리까지 커피를 가져다주지만, 여기는 한국이니 니가 와서 가져가. 라는 벨이 울릴때 빼고는 어지간히 깐깐한 거래처 미팅아니고서야 20분을 버티지못하는 커피집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어내려갔다.

창정이형이 문을 여시오~할때 감정이입 쩔더라.



하권에서 딕이 죽어서 유키랑 엄마 아메를 찾아가는 장면 즈음이었다. 
비록 24시간 영업이지만 시간이 꽤 늦어 사람이 없을 시간이었다.
내가 책에서 눈을 뗀건 일행도 없는 내 앞에 누군가 서 있는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많아봐야 대학교 1,2학년쯤 되는 여자애(지금 내 나이가 여대생보고 애라고 할만한 나이임--;;;)였다.
딱 그만한 나이대의 여자애였다. 
평범한 그 나이대 여자애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 나이대 여자애들에게서 느껴지는 생기라고는 1도 없었고, 
내가 여기서 농담 하나라도 잘못 던지면 고마해라 마이무따아이가.하고 죽기전 유언 하나 못남기고 엌하고 보내버릴만큼 살기가 느껴진다는 거였다.
대학교 축제때 다른 과에서 하던 유령의 집에 들어가서 유령분장한 애들 절반을 울리고 나온 적도 있는 내가 흠칫 할 정도로 살벌했다.

그리고 늦가을에 비바람이 퍼붓던 날이라, 퍽 쌀쌀했는데,
그 아이는 얇은 긴팔 티셔츠 하나에 얇은 츄리닝 바지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 칼부림 할 사람으로 날 택한게야...나도 내 새끼 옹알이는 들어보고 가야할것 아니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손짓으로 여기 앉으라고 한 후에, 냅다 튀려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을 보고...약정이 2년만 덜 남았어도...라며 땅을 치며 후회하고는 
카운터로 가서 "아메리카노 따듯하게 젓지말고 흔들어서."라고 주문하고는 다시 내 자리로 갔다...핸드폰 가지러...

내가 그때 핸드폰 가지고 냅다 튀지않은 이유는...그 아이가 에취!!!하고 재채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아이는 훌륭한 예비살인범에서 평범한 20대 여자애로 돌아왔다.

나는 주머니에 넣으려던 핸드폰을 그냥 고대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벨을 안주고 경찰을 부를까.하고 직접 커피를 들고온 알바생은 많이 풀린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시럽도 통째로 들고오더라. 

"마셔요. 추워요."
"..."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커피 한 모금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거세고, 이 가련한 여인을 주워갈 생각도 없었지만 두고 갈 수도 없어서, 다시 "뽕빨댄스모음"을 들으며 책을 읽어내려나갔다.



한참을 읽다보니 삿포로 돌핀호텔로 돌아간 주인공이 유미요시랑 자려는 딱 그 장면(...ㅋ)에서 
"저기..."
하고, 그 여자애가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예?"
"호...혹시...담배 있으세요?"
"아...잠깐만..."

담배를 끊은지 2년이 넘던 때라 담배가 있을리 전무했다.

카운터로 가서 아까 그 남자알바생에게 담배있냐고 물어봤다.
"있긴한데..."
절반남은 말보로 레드. 
"그거 저한테 5천원에 파세요."
"아뇨. 그냥 한까치 드릴께요."
"많이 필 것 같애요. 여기 5천원...라이타는 서비스로 좀 주시지?"

흡연석이 없는 가게라, 우리는 가게 쇼윈도 앞에 비를 피해서 나란히 섰다.
그녀에게 내 바람막이를 입혀주었다. 비바람은 여전했지만 내가 그닥 추위를 타는 편이 아니라 나는 그냥 있었다.
내가 담배를 주자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여주었다.

설마 내가 고등학생때 호기심에 처음 담배피워봤을때 친구에게 들었던 말을 생전 처음보는 여자애에게 할 줄 몰랐다.

"뭐하냐. 빨어."



콜록대며 기침을 한다. 
난생 처음펴보는 담배렸다.
히내리 올껀데...역시나 휘청거리길래 얼른 팔을 잡아주었다. 
여리고 가는 팔이었다.

"...담배는 이렇게 피는겨...잘봐."
2년만의 금연을 그렇게 한번 깨보았다.
그런데 젠장맞을 라이타가 비바람에 자꾸 꺼진다.
어?어?어?하는 나를 보며 그 여자애가 처음으로 풋!!!하고 웃었다.

정상적인 남자였다면 그 웃음에 바로 반했을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대에나 나올 수 있는 예쁘고 사랑스런 웃음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10년가까이 사귀던 여자에게 차이고 겨우 감정을 회복하고 살던 때였고, 연애감정은 씨도 말라버린 터라 순간 이거시 감히???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는 키득거리는 그 애에게서 담배를 휙 뺏아 담배불씨로 불을 붙였다.

오랫만에 피니까 아주 쭉쭉 빨리더라. 
몸이 니코틴을 원했는지 진짜 쭉쭉 잘 빨렸고, 나도 히내리가 와서 순간 비틀했다.

여자애는 진짜 ㅋㅋㅋㅋ하고 웃었고, 나도 어이가 없고 쪽팔려서 이런 제기랄ㅋㅋㅋㅋㅋ하고 웃어버렸다.



그렇게 둘이 3대씩 피고, 어질어질해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왜 나야?"
"네?"
"아까...내가 아가씨라고 불러도 기분나빠하지 말아요...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니 그냥 아가씨라고 부르는거니까...
아가씨 아까 누구 하나 죽일 기세던데...그게 왜 나였냐구."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내가 어디서 사람은 죽여본 적 없는데...혹시 친구 라는 영화 본 적 있어요?"
"...친구?"
"내가 고등학생때 유오성 장동건이 나온 영화있어."
"모르겠는데요;;;"
"...몇 살이셔 대체? 명절특선영화로도 본 적 없어?"
"네."
"거기서 유오성이 분한 준석 가라사대. 그런 커터칼로는 사람 못 죽여. 15cm이상 날의 사시미나 가능하다고. 커터칼은 말 그대로 뭐 자를때나  여기여기...내 경동맥, 이런데 단 칼에 썩둑 못할거면 그런 칼로는 염라대왕이랑 하이파이브 못한다고. 그러니 그 칼. 주머니에서 꺼내시지?"

여자애는 움찔하며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꺼냈다. 문방구에서 500원이면 사는 그런 커터칼이었다.
주머니에 얼핏 형태가 보일때 눈치채긴 했지만, 처음 봤을때 기세는 진짜 이쑤시개로도 내 곱창을 꺼내 볶아다가 찍어먹을 기세여서 진짜 쫄았었다.

"그리고..."
"네?"
"끝에 다 닳았잖아."
나는 커터칼 뒷부분을 빼서 커터날 닳은 쪽을 똑.하고 부러뜨려 새 날이 나오게 해주었다.
내가 칼날을 부러뜨리자 여자애는 얼굴까지 찌푸리며 어깨를 움찔했다.
내가 이런 애한테 죽을뻔했구나...허탈함이 막 밀려왔다.

"저...정말로...죄송합니다..."
"살려줘서 고맙다니까 무슨."
"커피도..."
"살려줘서 고맙다고 사드리는 겁니다."

내 앞의 그녀는 갑자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수년전 그녀에게 차이고도 울고싶어도 눈물이 안나와 다래끼낀것처럼 양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이 메마른 나는
내가 안 우는 만큼 남이 우는것도 꽤나 곤욕인 사람이다. 

어?어?어?하는 동안 여자애는 숨죽여 계속 울어댔고, 나는 잠시 정신이 든 통에 얼른 가서 따듯한 물을 떠다바쳤다.



그 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회사에서 창사기념으로 준거니까 괜찮다고 내 바람막이를 억지로 입혀서 만원 한장 창문 안으로 던지다시피 쥐여주고 택시태워보냈다.



그렇게 참 별일도 다 있구나...하고 끝날 줄 알았다....


 
출처 내 가슴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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