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결혼)하면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는가.

지금 딴년(놈)을 만난다, 내가 도박빚이 있다, 전과가 있다같은 하드코어한 사실을 감추려는거 말고 그냥 간단한거.

자냐고 물어봐서 잔다고 대답한 다음 컴을 켜고 게임을 한다거나, 뭐 이런것들.

 

두 여자를 비교해보겠다. 편의상 전여친 현여친(결국 지금 시점에선 둘 다 전여친들이지만)

애초에 여친을 비교한다는 것부터 쓰레기니 뭐니 얘기할꺼면 그냥 글을 스킵해라. 

나는 연애를 했고, 지금까지 평생 한명하고만 연애를 한게 아니다. 비교라는 말이 거슬리면 차이라고 해두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전여친에겐 거짓말을 한적이 없다. 

현여친에겐 거짓말을 밥먹듯이 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전여친을 더 사랑해서? 아니다. 

이유는 한가지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 

진실을 말하면 패널티를 받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단순한 사실이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였다.

 

혹자들은 얘기한다. 잘못한거 얘기했으면 당연히 패널티 받아야지. 

그렇다. 잘못을 했으면 패널티를 받아야한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럼에도 사실을 얘기하고 양해와 용서를 구하면 된다.

그래서 신뢰가 생기고, 그래서 서로의 마음이 더 깊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건, <잘못한 것>이라는 것.

만일 당신이 스스로 딱히 이게 왜 잘못인지 모르겠는걸 얘기했는데 패널티를 받는다면?

그때부터 거짓말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중요한 것까지.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온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회사를 다녔다. 일과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면 애인의 전화가 왔다.

 

오빠 어디야? 

응. 퇴근길이야. 

만나자. 

응 집에가서 씻고 옷갈아입고 나올께. 

아니 그냥 지금 바로와. 

몸 찝찝해서 그래 씻고 금방갈께.

안된다고 그냥 지금 바로와.

 

이 단순한 대화 상황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애인이 한시라도 빨리 보고싶은 사랑꾼이 보이는가? 

 

하루 종일 일하고 땀과 피로에 찌든 몸으로 집에 가는 길이다. 씻어야 개운하고, 씻어야 힘이 나는 사람도 있다. 

내 몸에서 나는 찌든 체취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 혹은 길에서 만나는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게 느끼게 하기 싫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일 끝나고 바로 만나자는 주문...아니 명령...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그 명령은 패널티와 다를게 없다. 

 

이게 시작이었다. 

일과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늘 전화해서 퇴근을 확인하고 바로 만나자는 애인의 요청에 슬슬 몸이 피로해져갔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지칠 수 있을까? 누구는 아무리 피곤해도 애인만나서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가 집에 간다던데.

TV에 나오는 어떤 연예인 부부는 해외에서 비행기타고 얼굴 한번보기 위해 왔다갔다고 한다지. 

 

육체피로는 낭만으로 커버되는 영역이 아니다. 체력을 기반으로한 적당한 영양공급과 휴식을 요구하는 것이지.

전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적절한 보급이다. 승리를 향한 열망과 의지와 정신은 대일본제국군이나 강조하던 일이다.

 

누군가 일과후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가 집에 갔다면 그건 그냥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만큼의 체력은 남겨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야근 중 이라고. 야근은 늘 8~10시에 끝나니까, 그날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좋았다. 피로에 찌든 몸을 개운하게 쉬게 할 수 있는건 직장인의 로망이니까. 

야근 중이면 당연히 야근 중이라는 <진실>을 얘기했고, 정시퇴근일에도 야근중이라는 <거짓>을 얘기했다. 

 

또다른 진실을 얘기했을때도 패널티를 받았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는 얘기. 

나에겐 친구들이 있다. 살던 곳에서 이사온지라 친구들은 1~2시간 걸리는 이웃 도시에 살고 있다.

 

흔한 패턴인 맨날 친구들과 진탕 술먹고 술집가서 여자 꼬시고 여자친구에겐 집이라고 거짓말 하는, 그런 시나리오가 아니다.

 

술싫어하고 만나봐야 밥먹고 커피숍가서 얘기하는게 끝인, 그런 친구들. 

그마저도 인근에 살고 있지 않는 만큼 한달에 한번? 혹은 두세달에 한번 만날까 말까한 친구들.

그런 친구들과의 약속을 얘기해도 나는 패널티를 받았다.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 다는 잔소리라는 패널티.

매번 친구들과의 약속만 챙기고 자기는 외면한다는, 나쁜 남자니까 헤어져야 겠다는 투정의 패널티.

매일, 혹은 2~3일에 한번, 주말마다 애인을 만났는데, 두어달에 한번 친구들을 만나는건 '매번'이 되는 마법. 

아주 가끔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그건 어마어마한 <양보>이자 유세거리가 되었다. 내가 지난번 양보해줬으니 이번엔 내말 들어야 한다는 근거 말이다. 

그런 징징거림을 달래주며 지쳐갔고, 그래서 또 거짓말을 했다. 친구 만나는 주말에 회사에 일이 있어 출근했다는 거짓말.

 

거짓말은 통화를 통해서도 해야했다.

집에 가면 자기전에 잠깐 게임을 했다. 오빠 뭐 하냐는 카톡이 오면, 나는 게임한다는 답톡을 보냈다. 패널티는 그때도 있었다.

집에 갔으면 쉬어야지 왜 게임을 하냐는 잔소리라는 패널티. 이 잔소리는 만남때도 이어졌다.

유독 격무에 시달리는 주 주말에 애인과 만나며 하품이나 피로감을 조금이라도 얘기하면, 으레 게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자기한테 소홀히 한다,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피곤하면 집에서 쉬어야지 게임하니까 더 피로해지고 자기한테 소홀히 한다...

이런 패널티. 

 

나는 집에서 자기전에 잠깐 게임을 했을뿐이다.

한번 게임을 잡고 밤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롤 AI전 한두게임을 하거나 GTA 5를 하며 드라이브 한바퀴 도는 정도?

그 시간이라고 해봐야 아주 오래해도 12시를 넘기지 않았다. 

이 시간까지 게임을 하건 게임을 안하고 그냥 자건, 격무에 시달린주 주말에 피곤한건 다를게 없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얘기한 것에도 그런 패널티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거짓말을 했다. 

10시나 11시, 오빠 잔다고, 너도 잘자고 사랑한다는 평범한 연인들간 취침 얘기들을 하고, 난 컴퓨터를 켰다.

 

이런 식의, 이런 정도의 거짓말이 아주 오랜기간 반복되자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사소한 거짓말이 계속되자, 진실을 얘기해야 하는 것들에도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있는 자리에 간다던가, 대학 친구들을 만난다던가, (여자는 없지만)친구들과 여행을 간다던가 같은 것들.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 거짓말은 머리가 좋아야 할 수 있다. 시나리오도 써야하고, 시간과 논리도 계산해야한다.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거짓말은 두통을 불러오는 일이기에

사소하더라도 거짓말이 반복될 수록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나는 왜 이딴것까지 연인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하는가

라는 회의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하고나면, 쉬어도 쉰것 같지 않고, 게임을 해도 스트레스만 받고, 친구를 만나도 안절부절이 되어버린다.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과음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일상의 영위조차도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스트레스는 매우 컸다.  

그렇게 마음이 마모되기 시작했고 연인과 만나도 짜증과 다툼이 점점 늘어갔다. 

그런 다툼의 기간과 횟수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몇번의 큰 다툼 후 우린 끝났다.

 

전여친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사소한 진실에 대한 패널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자기 가치관과 다소 다르다 해도 내 영역을 존중해줬다.

나의 휴식, 나의 친구들, 나의 여가를 존중해줬다. 

 

존중해줬기에 진실을 얘기할 수 있었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만큼 연인을 향한 내 감정에만 집중 할 수 있었다.

비록 다른 이유때문에 헤어졌지만, 전여친의 연애기간동안만큼은 이런문제로 인한 다툼따위는 없었다.

 

어제 인스타를 하다가 그런 글을 보았다. 

남친에게 전여친 얘길 물어봤더니 남친이 그 미끼를 덥썩 물길래 지랄을 했다는 얘기. 

전여친 얘기하는 꼬락서니가 남친이 아직 못잊은거 같다는 얘기.

애초에 자기가 물어봤는데, 남친이 나쁜 남자가 되는 분위기.

10~20대 연인들 연애에 있어 큰 금기나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친구고 취미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하는게 연인이라는 뉘앙스들.

 

가볍게 보고 넘겨도 되는 글들이지만, 앞서 언급한 연애전쟁을 치룬 입장에선 입이 매우 쓰게 느껴졌다.

진실을 얘기하는 것에 과중한 패널티를 주면서 진실을 요구한다면, 누가 과연 진실을 얘기하겠는가.

상대방의 진심을 떠보기위해 함정을 파고, 그 함정에 빠진 상대에게 패널티를 주고, 

그렇게 진실을 어렵게 얘기하는 상대에게 패널티를 주는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한번은 속아서 진실을 얘기할지도 모르지만, 패널티를 받은 연인은 이후 거짓을 늘어놓게 될 것이다.

머리가 좋건 머리가 나쁘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