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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게시물ID : lovestory_440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강쥐색희
추천 : 0
조회수 : 63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26 03:39:09
6.25 이었슴니다. 벌써 62년전이던 그날이 그리 먼 옛날도 아니었는데 짧은 세월에 한국은 기적을 이루웠고 이젠 선진국으로 되어가고 있슴니다. 그 옛날 UN군으로 참여한 많은 나라들 중에 필리핀, 태국, 이티오피아... 특히 이티오피아가 인상이 깊은 나라였더라고요. 그 당시 우리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가난한 나라로서, 아니면 한국보단 더 잘살던 나라였을까요? 아프리카나라로서 참가했던 국가는 아직도 굼주림으로 어렵게 살고있는 나라잖아요. 그리고 이젠 한국이 필리핀이나 태국보다 훨씬 선진국으로 앞서가고있는 나라로서 기적이라고 인정해야죠. 눈물이 나도록 자랑스럽슴니다. 옛날 어렸을때 부터 우리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은 밥톨 하나라도 버리면 뭐라고 야단 하셨죠. 밥 한톨이 어렵게 농사한 농부들의 땀방울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함부로 그런 열씸히 일한 사람들의 귀한 땀방울을 쉽게 버리고 그러냐고.. 옛날 전쟁시절을 다시 격어봐야 모든게 얼마나 소중한걸 알것이라고.. 하시면서 ㅉㅉ 거리셨죠. 나만 그랬었나? 그래서 아직도 밥 한톨이라도 버리면 그렇게 아깝더라고요. 식당이나 마켓에서 버리는 아까운 음식들보면 아직도 굶주리고 있는 북한사람들이 생각나곤 함니다. 그리고 살이 넉넉히 찐 사람들 보면 살을 북한사람들과 반반씩 나누웠으면 하는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되고요. 세상은 왜 왠만큼 공정하지 않는지 아직도 해답을 찾고 있슴니다. 울 엄니는 6.25가 터졌을때 서울에서 살았는데 다.행.히. 근처 허순경아저씨라는 순경아저씨를 밥도 해주시고 빨래도 해주신 외할머니 덕분에 잘해주셧던 보답으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피난을 갈수 있었담니다. 만.약. 그때 기차타고 못갔으면 아마 서울에서 마지막 날을 보냈었지도 몰랐담니다. 기차도 그땐 물론 티켓이 없고 너도나도 빈칸이 있으면 타고, 옆에도 매달리면서, 또 지붕에도 타는 사람들이 많았담니다. 울 엄니 가족들도 어렵게 그 허순경아저씨 도움으로 지붕위에 부랴부랴 올라타서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 갔담니다. 어렸던 울 엄니는 그 허순경아저씨가 긴라이플같은 총으로 오른쪽왼쪽으로 휘휘 져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물러가게하고 울 엄니가족들을 지붕위에 올라가게하여 태우셧던 그 허순경아저씨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담니다. 그땐 차례로 줄스는 개념도 당연히 없었슴니다. 전쟁에 무슨 규칙이나 법이 있담니까.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가면서 잠시 들렸던 시골마을에서 휴식?겸 그 마을에서 사람들이 팔고있는 음식이나 특히 물을 피난민들은 사먹으면서 그랬담니다. 특히 물을 사서 마시는데 뭐 물을 파는 주민들도 대충 임시 장사를하고 있으니 컵이나 그런것이 없었슴니다. 그래서 울 외할머니는 급한 나머지 고무신을 벗어서 물을 담어가지고 아이들에게 먹였담니다. 이런 그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그당시 물이고 컵하나이고 정말 귀하게 느껴지면서 눈물만 나옴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하여 빈 자리가 있으면 거기가 무족건 "우리집"으로서 천막치고 생활을 하엿담니다. 이렇게들 우리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사셨슴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도 "배가 부른 탓인지" 벌써 그런 옛시절을 쉽게 잊어지고 있는것이 안타깝기만 함니다. 한국사람들 보면 음식 잘 버려요. 한국에선 지금은 "doggy bag" 란 문화가 있는지 없는지 잘 보면 너무나도 쉽게 버리는것 같슴니다. 저는 다른것은 몰라도 굶주림으로 아직도 어렵게 사는 북한동포들을 생각하면 음식쓰레기에 대한 "집착"인지 아깝기만 함니다. 이젠 너무나도 한국도 잘 먹고 잘살아서 비만으로 문제가 있으니 세월이 얼마나 이렇게 변했슴니까.. 그냥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 시절을 흑백 사진과 비됴를 보면서 상상하면서 넋두리를 하고 있슴니다.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못하도록 열심히 살아야겠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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