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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 같은 것들도
게시물ID : lovestory_721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피네간의경야
추천 : 2
조회수 : 125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2/19 14:42:25
맥박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답장을 쓰다 말고
 
눅눅한 구들에
불을 넣는다
 
겨울이 아니어도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는
밤이 이르고
 
덜 마른
느릅나무의 불길은
유난히 푸르다
 
그 불에 솥을 올려
물을 끓인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 같은 것들도
 
뚝뚝
뜯어넣는다
 
나무를 더 넣지 않아도
여전히 연하고 무른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당신의 연음」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문병 - 남한강」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 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 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레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꾀병」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 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세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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