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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낮아 대인관계가 어려워요"
게시물ID : lovestory_814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idway
추천 : 6
조회수 : 95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3/14 09: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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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평소에 유튜브와 카카오스토리를 통해 스님의 법문을 접하면서 힘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을 왜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는지 보고 난 후에는 혼자 집에서 매일 108배도 합니다.

저는 평소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존감이 낮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사기당하거나 잃어버리는 경우에는 ‘원래 내 돈이 아니었나보다’하고 마음을 잘 접는 편인데,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에는 제가 앓아누울 정도로 그 충격을 심하게 받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접한 뒤로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108배를 하면서 이겨내기도 하는데, 전반적으로 제가 자존감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지 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제 마음을 어떻게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네, ‘자존감이 낮다, 돈은 잃어버려도 금방 회복하지만 사람에게는 상처를 쉽게 받는다’하는 설명은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그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만 한 번 간추려서 말씀해보세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빨리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네, 그럼 스님이 질문자에게 물어볼게요. 사람에게 왜 상처를 받습니까?”

“상대에 대한 기대와 때로는 제 욕심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상대방에 대한 제 믿음이 커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질문자 이야기대로 상처를 입는 이유가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가 커서라면 다음부터는 기대를 낮추면 되잖아요. (질문자와 청중 웃음)”

“제 욕심인 건 알겠는데…”

“욕심인 걸 알면 욕심을 내려놓으면 되잖아요. (청중 웃음)”

“그래서 108배를 하고 있는데요…”

“욕심을 내려놓는 거랑 108배랑은 무슨 관계가 있나요?(청중 웃음)”

“그게 잘 안 되니까 스님께 여쭤보려고 왔어요.”

“108배를 한다고 마음의 욕심이 내려놓아지나요? (질문자와 청중 웃음)”

“그래도 스님의 영상에서 주변에 감사하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렇게 따라 해봤더니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어요. 그래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조금 더 알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누구한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상처를 받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세요. 실제로 일어난 예를 알려주면 그걸 가지고 우리가 원인이 무엇인지 연구를 해볼 수 있어요.”

“주변에 알고 지내는 언니들, 동생들이 있어요. 저는 평소에 그 사람들이 좋다고만 생각해서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주변에도 좋은 이야기만 하는 편인데, 그들은 제가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저에 대한 험담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속상합니다. 그리고 아는 지인들을 서로 소개시켜 주었는데 나중에는 그 둘이 더 친해지고 저와의 관계는 소원해질 때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그래요. 그럼 그 이야기는 잠시 놓아두고 여기 무대 위에 있는 작은 구멍을 한 번 보세요. 스님이 저기에 공을 넣고 싶어서 던지려는데, 던지기만 하면 공이 매번 구멍 안에 들어갈까요, 들어갈 때도 있고 안 들어갈 때도 있을까요?”

“들어갈 때도 있고 안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넣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넣기 위해서 던지면 늘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들어가면 좋겠지만 안 들어갈 때도 있죠.”

“내가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돈을 갚나요, 사정에 따라 못 갚을 수도 있고 안 갚을 수도 있나요?”

“못 갚거나 안 갚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대인관계에서도 ‘나는 네가 좋아’하고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도 매번 ‘나도 너 좋아’하고 반응을 보일까요, 그런 반응을 보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을까요?”

“네,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요. 이번에는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네가 좋아’라고 할 때 상대방도 ‘나도 너 좋아’라고 할 확률이 높을까요, 아니면 ‘나는 네가 싫어’라고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은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아’라고 할 확률이 높을까요?”

“제가 상대방이 좋다고 할 때 상대방도 저를 좋아할 확률이 높겠죠.”

“네. 지금까지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내가 ‘싫어’할 때보다는 ‘좋아’라고 할 때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는 반응을 보일 확률이 높고, 그러나 내가 ‘좋아’라고 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반드시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 질문자는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방도 반드시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 이제 더 이상 상대방을 좋아할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그래도 내가 상대방을 싫어할 때보다는 좋아할 때 상대방도 나를 좋아할 확률이 높으니까 나는 나대로 좋아한다고 표현을 하겠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제가 상대방을 싫어할 때보다는 좋아할 때 상대방도 저를 좋아할 확률이 높지요.”

“그래요. 그런데 질문자와 상대방의 행동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이치가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려는 거예요. 질문자에게 다시 물어볼게요. 질문자가 상대방에게 좋다는 표현을 할 때 상대방도 반드시 좋다고 화답을 하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화답을 하면 바른 행동이고, 상대방이 질문자를 좋아하지 않으면 나쁜 행동인가요? 아니면 상대방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까?”

“자연스러운 이치는 맞습니다.”

“그럼 질문자가 아는 언니에 대해 칭찬을 했더라도, 그 언니가 질문자에 대해 비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네, 맞아요.”

“그런 자연스러운 일에 왜 상처를 입나요? 마치 봄에 잎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 그로 인해 상처를 받아요?”

“그러니까요. (청중 웃음)”

“이렇게 대화를 하고 보니 상대방 때문에 상처를 입은 거예요, 질문자가 잘못 생각해서 상처를 입은 거예요?”

“제가 잘못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질문자는 어떻게 잘못 생각했나요? 은연중에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면 상대방도 반드시 나를 좋아할 거다’라고 생각한 거죠?”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내가 돈을 빌려주면 상대방이 반드시 갚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잖아요. 나는 빌려주지만 상대방은 갚을 수도 있고, 안 갚을 수도 있는 거예요. 갚으면 의리 있는 사람이고, 안 갚으면 배신하는 사람인가요? 아니에요, 빌려줄 때부터 이미 상대방은 갚을 수도 있고 안 갚을 수도 있는 거예요.”

“네, 그런데 저는 제가 좋아하니까 상대방도 나를 좋아해야 한다거나 혹은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 주기를 기대했다기 보다는, 제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제 뒤에서는 안 좋은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네, 질문자가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 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없을 때 이야기하는 것이 늘 똑같습니까, 다를 수도 있습니까?”

“… (질문자 웃음)”

“질문자는 늘 똑같나요, 질문자도 가끔 다를 때가 있나요?”

“다를 때가 있습니다. (질문자와 청중 웃음)”

“질문자가 상처를 입었다고 하니 ’무엇이 상처가 되었나’하고 따져봤는데, 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세상이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에 상처를 받잖아요.”

“대부분 사람들 누가 그런 것에 상처를 받나요? 질문자만 그래요. (청중 웃음) 여기 계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래 인생이 그런 거다’하고 상처를 안 받아요. (질문자 웃음) 심지어 조그마한 아이들도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아빠를 꼰대라고 부르기도 하잖아요. (청중 웃음) 여자들도 속상한 일 있으면 남편 없을 때 남편 흉을 보기도 하고 시어머니 흉을 보기도 하잖아요. 시어머니 보는 앞에서는 어때요? 안 하잖아요. (청중 웃음) 이렇게 강연 중에는 박수를 잘 치다가도 강연장을 나가면서 ‘왜 저런 이야기를 하나’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어요. (청중 웃음) 옛 말에 뒤에서는 임금 흉도 본다고 하잖아요.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흉을 본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청중)”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흉을 본 사람은요?”

“있어요. (청중)”

“네, 흉 정도가 아니라 모함을 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아서 처형하기에 이르렀잖아요. 질문자는 예수님만큼 훌륭한가요? (질문자와 청중 웃음)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고 없는데서 흉 조금 본 걸 가지고 뭘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스님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질문자가 질문 속에서 자존감이 낮다고 그랬잖아요. 질문자는 머릿속에서 자기 존재를 부처님이나 예수님보다 더 높게 정해두고 있어요. 그런데 현실 속의 자기는 그에 미치지 못하니까, 즉 ‘생각하는 자기’보다 ‘현실 속의 자기’가 부족하니까 자존감이 없는 거예요.

마음속에서 ‘나는 별 거 아니다, 길옆의 풀과 같다’라고 생각하면 현실 속의 나는 풀보다는 나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자존감이 생깁니다. 풀도 사는데 왜 내가 못사나요? 풀은 지나가는 사람이 밟고 지나가도 아무 소리 안 하는데, 나는 밟은 것도 아니고 그냥 욕만 조금 한 것일 뿐인데, 그것도 듣는 데서 한 것도 아니고 안 듣는 데서 한 것이잖아요. (청중 웃음) 남이 내 욕을 할 때 내가 듣는 데서 하는 게 좋아요, 그래도 안 듣는 데서 하는 게 좋아요? (청중 웃음)

질문자는 안 듣는 데서 욕한다고 뭐라고 하니까, 그냥 듣는 데서 해줄까요? (질문자와 청중 웃음)”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있는 데서 하면 무안해지니까 그래도 없는 데서 하는 게 낫잖아요. (질문자와 청중 웃음)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인가요, 질문자가 생각을 잘못해서 상처를 입은 거예요?”

“제가 생각을 잘못 했습니다.”

“어떻게 잘못 생각했나요? 상대방이 상처를 줘서 받은 거예요, 아니면 상처 받을 게 없는데 질문자가 만든 거예요?”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래요. 왜 없는 상처를 굳이 만들어서 스스로 상처를 입나요? (질문자와 청중 웃음) 그건 그냥 자기가 자기 자신을 계속 송곳으로 찌르는 것과 같아요.”

“저도 안 하고 싶은데…”

“아프면 그냥 안 하면 되잖아요.

이치를 알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앞에서는 칭찬하고 안 보는 데서는 욕하는 것은, 물론 안 보는 데서도 칭찬하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보는 앞에서까지 욕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러니 그 사람은 나름 예의가 있기 때문에 보는 앞에서는 칭찬하고 안 보는 데서만 욕하는 거예요. 예의 없는 사람은 보는 데서도 막 욕하고 그래요. 그래도 그거보다는 낫잖아요?

그러니 ‘그래도 이 언니는 나를 생각해서 흉보고 싶더라도 내가 없을 때 보는구나. 나를 배려해줘서 고마워’라고 생각하면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출처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6852&page=1&p_no=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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