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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세상을 믿는다
게시물ID : lovestory_816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7
조회수 : 51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3/28 22:34:58

사진 출처 : http://missaphotoblog.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lVkFBmbTvCA





1.jpg

김상미끝없는 비애

 

 

 

언제나 나는 흔들린다 바람에 흔들리고 사랑과 미움에 흔들리고

아름다움에 흔들리고 꽃에 흔들리고 오래된 바위에 흔들리고 물

소리에 흔들리고 우연에 흔들리고 밥과 가족에게 흔들리고 삶과

죽음에 흔들린다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내 몸의 모든 솜털 유유히 일어서고

나는 바로 서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자잘한 악행

유유히 되풀이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더럽힘에 대한 그리움

나를 내 밖으로 힘차게 내던지는 불가사의한 그 힘

 

사람들은 그 힘을 연민이라 부르고

나는 그 힘을 끝없는 비애라고 부른다

끝없는 비애를 먹고 자라고 살찌는 나

 

언제나 나는 흔들린다 노란 은행잎에 흔들리고 황혼에 흔들리고

함성과 침묵에 흔들리고 검은 웃음에 흔들리고 너에게 흔들리고

믿음과 배신에 흔들리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에 흔들리고 잡을 수

없는 욕망에 흔들린다

 

나로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끝없는 비애

그것이 내가 발음하는 모든 것들 속의 나이고

내가 사는 시대이고

내가 버린 어머니의 영혼이 울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이다

 

흔들리는 순간은 짧고그 슬픔은 영원하지만

나는 흔들림으로써 내 삶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과도한 이성이 댕강댕강 나를 잘라먹지 못하도록

절망의희망의 오래된 녹슨 문들을 삐꺽,하고 연다

미친 듯 살과 뼈가 부딪는 끝없는 비애의 화신이 되어

수많은 타인들이 가득한 광휘의 순간 안으로

다시 돌아와 나를 끌어들인다

 

온몸이 환한 빛이 될 때까지

온몸이 칠흙 같은 어둠이 될 때까지






2.jpg

전순영타버린 여자

 

 

 

비가 내리는 밤이면 그의

우산이다가

허기가 질 땐 먹이가 되어 주고

지칠 땐 풀밭이 되어 포옥 품어 주는 여자

양털 침실에 누우면 절벽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

좌정하고 앉으면 불의 기 물의 기 강아지의 기

불러들이고

옥죄었던 몸 풀어놓고

백설 공주이다가 탁녀이다가

눈을 따악 감고 누드 모델이 된다

왼쪽 뇌 속엔 고전이 가득 담긴 책장이다가

오른 쪽 뇌 문을 열면 와르르 뛰어나와

침대가 되어

마마 자국 손톱 자국 마른 주름살

가슴 찌르던 옹이까지 흠뻑 싸안는 눈먼

홑이불이다가

한 개비 담배 연기로 피어오르는 동그라미 속에

흩어지는 수만 마리 나비 떼







3.jpg

허만하이별

 

 

 

자작나무 숲을 지나자 사람이 사라진 빈 마을이 나타났다

강은 이 마을에서 잠시 방향을 잃는다

강물에 비치는 길손의 물빛 향수

행방을 잃은 여자의 음영만이 짙어가고

파스테르나크의 가죽 장화가 밟았던 눈길

그는 언제나 뒷모습의 초상화다

멀어져가는 그의 등에서 무너지는 눈사태의 눈부심

눈보라가 그치고 모처럼 쏟아지는 햇살마저

하늘의 높이에서 폭포처럼 얼어 있다

 

우랄의 산줄기를 바라보는 평원에서 물기에 젖은 관능도

마지막 포옹도 국경도 썰렁한 겨울 풍경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선지피를 흘리는 혁명도 평원을 건너는 늙은 바람도

끝없는 자작나무 숲에 지나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광야에서는 지도도 말을 잃어버린다

아득한 언저리뿐이다

 

평원에서

있다는 것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그는 뒷모습이다

휘어진 눈길의 끝

 

엷은 썰매소리 같은 회한의 이력

아득한 숲의 저켠

 

풍경을 거절하는

나도

쓸쓸한 지평선이 되어버리는







4.jpg

박장호새벽 네 시의 나프탈렌

 

 

 

담배로 양치질을 했다

자전거를 탄 소녀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새벽 네 시

 

스침의 동의어인 내 생애의 인연이

단 몇 초로 요약된 것 같았다

 

형광등에 젖은 커튼의 연두색이

방의 울음 같았다

 

새벽의 이마에 굵은 못이

마음의 핵심처럼 박혔다

 

날숨에 섞인 박하향 나프탈렌을 못에 걸고

방으로 돌아와 울음을 만졌다

 

빛에 젖은 커튼의 흐름을 따라

강제로 사랑한 첫사랑의 귀신들이 창을 빠져나갔다

내가 만진 울음의 공기가 탁했던 것이다

 

마음을 창밖에 걸어 두었으니

이젠 귀신들도 심호흡을 할 때

청명한 마음속에서 편히 쉬라

 

자전거를 탄 소녀가 골목을 빠져나간

새벽 네 시

입속에서 울음이 기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5.jpg

김이듬나는 세상을 믿는다

 

 

 

밤에 걸어도

골목길을 가만히 누가 뒤따라와도

나는 믿는다

 

꽃필 것을 믿고

그 지독한 냄새와 부스러기에 과민증이 도질 것을 믿는다

흐드러진 흰 꽃의 가치는 스러지는 데 있고

꽃나무 아래 하얀 목덜미를 젖힌 소녀에게

무자비한 사랑이 주어질 것을 믿는다

 

가구와 수집품을 밖으로 끌어내고

커튼을 뜯어 젖히고

네 마음을 건드린 소리와 색채에 묻혀있던 내 몸뚱이를

보라

사랑이여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나는 믿는다

오늘의 뉴스를 믿고

유랑극단을 믿고

노래와 서커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어떤 음악도 독서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철거반도 폭격도 내 식사를 망치지 않는다

사랑아너는 파리처럼 날아왔다 떠날 것이다

대충 이러다 멈춰줄 걸 믿는다

 

뜸하게 물을 줘도 꽃은 피고

물주지 않았는데 흙에서 반쯤 나와 피어나는 꽃도 있다

그런 꽃일수록 끔찍하다

마스크를 쓰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조용한 골목에 강도가

어쩌면 기다리는 애인일지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강간은 끝나지 않고 전쟁은 더더욱 치밀해질 것이다

우리는 충분지 않은 과오를 나누고

끝내 나아지지 않은 채 사라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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