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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벽제중 건립에 숨은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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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다윗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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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17/08/13 08: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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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벽제중 건립에 숨은 도움

박기범 기자

승인 2008.08.20 00:00

경주 김씨는 수백년간 지붕재를 중심으로 인근에 모여 살았다.

대자동은 맑고 청량한 산이 마을 전체를 보호하듯이 둘러싸고 있다. 또한 토질이 좋아 농사를 짓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렇게 산과 땅과 조화를 이루며 수 백년을 대자동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경주 김씨 공호공파 사람들이다. 지역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왕손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경주 김씨는 그러나 아직도 순박한 마음을 지녔다.

그러나 도·농 복합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고양시에는 여전히 집성촌들이 존재한다. 이에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지난 14일 경주 김씨를 찾았다. <편집자>

취재·조사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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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경주 김씨 공호공파 대자동 종중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 경주 김씨 공호공파 집성촌 대자동

신라 경순왕 그리고 왕손의 후예들

고양시 대자동에서 살고 있는 경주 김씨는 조선시대 김계성이 고양에 오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381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계성이 지금 대자동 경주 김씨의 입향시조다. 원래 김계성의 묘가 지금의 서삼릉 자리에 있었다. 지금 서삼릉이 위치한 자리는 과거 경주 김씨 문중의 땅이었다.그러나 당시 국가에서 그 자리에 능을 만든다고 하면서 그 사패지로 경주 김씨에게 대자동 땅을 내준다. 그 뒤부터 경주 김씨는 고양시 대자동에 정착해 수 백년을 살아오고 있다. 김계성의 묘는 현재 대자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삼릉이 개발될 때 김계성의 묘소를 찾지 못해서 지금은 설단만이 세워져 있다.김지용 경주 김씨 공호공파 종중 고문은 김계성 어른의 묘를 쓸 때 지관이 이곳이 명당이라며 봉분을 세우지 말고 평토(관을 묻은 뒤에 평지같이 평평하게 함)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나중에 묘를 찾기가 어렵더라고. 서삼릉이 들어섰는데도 묘를 찾을 수 없어서 결국 문중에서 10년 전에 대자동에 김계성 어른의 설단을 세웠어라고 설명했다.경주 김씨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경은부원군과 김홍집 등이 배출됐으며 당상관 이상의 벼슬만 1천명이 넘는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개국공신으로서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경주 김씨는 연원을 따지면 모두 경순왕의 후예들이다. 김덕경 씨는 왕손이라는 사실이 살면서 내게 큰 힘이 된다. 어디를 가도 떳떳할 수 있었다. 왕손이라는 사실이 큰 자부심이다. 경순왕이 시조인 김알지에서 28세손이며 내가 61세손이다라고 말했다.또한 이들은 청백리로서 그 이름을 날리며 주위의 존중을 받았다. 특히 경주 김씨의 6조 청백리가 유명하다. 조선시대는 물론 6·25 이후까지도 고양 지역에 부임 받은 관리들은 경주 김씨 문중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예를 표시하기도 했다.

김원식 경주 김씨 공호공파 종중 문장은 우리 가문은 6조 청백리로 유명한데 보통 5조 청백리는 있지만 6조 청백리는 경주 김씨 하나다. 요즘 공직사회를 보면 뇌물 수수 등 비리 문제가 자주 나오는데 경주 김씨의 6조 청백리가 이런 시대에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이런 기상은 종중 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김계성의 종손인 김형식 씨는 지난 16일 경주 김씨 계림군파 대종회 족보편찬위원회 공동회장에 선출됐다. 더구나 조상에 대한 감사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식이 미약해져 가는 시기에 중책을 맡게 돼 가문에서도 그에 대한 기대가 크다.

경주 김씨 공호공파 종중들. 조상들이 6조 청백리를 지냈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이들에게는 자긍심이 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김부경, 김지정, 김지용 고문, 김원식 문장, 김덕경, 김학선

숲이 많아 땔감 팔며 생계

대자동 경주 김씨는 지붕재라 불리는 산을 중심으로 좌, , 산 넘어 등에 각각 흩어져 살아왔다.김형식 씨는 “6.25 전후까지도 50여가구가 모여 살았으며 고벽제, 웃고을, 아랫대작골에 분포해서 경주 김씨가 살고 있었다. 지금은 20여 호 정도가 모여 살면서 집성촌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대자동에서 퍼져나간 후손들이 전국적으로 번창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자동은 땅이 좋아서 농사가 잘되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해왔다. 또한 숲이 많아 땔감으로 쓸만한 나무들도 많았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는 일산 사람들이 대자동까지 와서 나무를 해가고는 했다.김원식 문장은 여기가 워낙 나무가 많아서 일산 사람들이 이 곳으로 나무하러 많이 왔다. 당시에 산에서 나무를 해다 많이 팔았다. 또 솔가리(말라서 땅에 떨어져 쌓인 솔잎)를 긁어서 서울까지 40리 길을 걸어서 내다 팔기도 했다고 말했다.김지용 고문은 광술이라고 불쏘시개로 쓰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묶어서 내다 팔기도 했다. 그 때는 나무나 광술 등을 내다 팔면서 살았다며 그 때의 생활상을 설명했다.

경주 김씨는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문중의 재산도 아까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 가문의 제실이 대자동 809번지에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회관을 짓는다고 하자 문중에서는 제실이 있는 땅을 제공, 그 후로는 경주 김씨의 제실과 마을회관을 같이 쓰고 있다.

또한 경주 김씨 공호공파 종중의 김지용 고문의 고조부 되는 김정부는 일찍부터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이에 김정부는 1880년부터 30년 동안 마을에서 서당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등 지역의 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대자동 인근에는 벽제중학교가 있다. 과거에 지선 중학교라고 불리던 이 학교는 대자동, 관산동, 내유동 등 인근에서는 유일한 중학교였다. 지역 청소년들의 질 높은 교육을 위해 마련된 이 학교의 설립을 위해 한씨 문중에서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지역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그러나 지역 교육 발전을 위한 벽제중학교 설립에 경주 김씨 역시 숨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김원식 경주 김씨 공호공파 종중 문장은 벽제중학교를 지을 때 경주 김씨에서 산을 팔아서 학교에 건축비를 제공했다고 말했다.김지용 고문 경주 김씨는 정이 많은 집안이다. 대자동은 땅이 좋아서 농사도 잘 됐고 인심도 좋은 참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 곳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산다는 말이 있다며 경주 김씨의 넉넉한 마음에 대해 설명했다.

경주 김씨를 빛낸 사람들 - 김주신, 김홍집

조선 마지막 총리대신 김홍집 묘 대자동에

왕의 장인이면서도 올곧은 처신으로 유명한 경은부원군의 묘소

경주 김씨가 살고 있는 대자동 인근에는 200여기 가량의 조상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이 숙종 시대에 왕의 장인으로 올곧은 처신으로 유명한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묘다. 덕양구 대자동 산26-1에 위치하고 있는 이 묘소는 현재 고양시 향토유적 제 18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후기는 외척의 정치 개입으로 혼란이 일었던 시기다. 이런 때에 김주신은 자신을 낮추고 조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청탁도 하지 않아 주변의 존경을 샀다.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총리대신 김홍집의 묘도 대자동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파주에 있던 것을 대자동으로 이장한 것이다. 아관파천 후 김홍집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자 김홍집의 주변 사람이 그의 묘를 파주에 썼으나 몇 년 전 종중에서 고양으로 이관했다.

1842년에 출생한 김홍집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다. 고종 5(1867)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1880년 예조참의로서 수신사가 되어 일본을 다녀온다.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한 공으로 예조참판에 오르나 개화를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배척운동이 일어나 사직하게 된다.고종 19(1882) 구미열강이 통상요구와 임오군란의 뒷처리 등 복잡한 국제문제에 부딪친 정부에 다시 기용되어 한미, 한영 등 조약체결의 부사, 1882년에는 이유원과 함께 조선전권으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 체결의 부관으로 외교수완을 발휘, 경기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이후 1, 2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단발령의 강행과 고종황제의 아관파천 후 친로파 내각이 조직됨으로서 김홍집 내각은 막을 내리고 많은 대신들이 피살된다. 김홍집 자신도 광화문에서 피살되면서 삶을 마감한다.

세월에 묻혀 가는 경은부원군의 재궁

숙종의 장인인 경은부원군의 묘소를 찾아가다보면 오래된 가옥 한 채가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곳곳에 낙서도 보이고, 많이 훼손됐지만 이 곳이 바로 경은부원군의 재궁이다.

문중에서 이 집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리를 할 수 있는 일부의 보조금 정도만 받았을 뿐 문화재 지정을 통한 보존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견뎌온 재궁은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할 정도가 됐다. 종중에 따르면 이 재궁을 조사했던 사람들이 건축 양식이 특이하고, 주춧돌과 석재들이 고려 때 왕실에서 사용됐던 것들이라며 그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기범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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