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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익숙해 진다는 것
게시물ID : lovestory_846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2/04 21:28:50

사진 출처 : http://kxrg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NKRojNkMfHs





1.jpg

전남진구부러진 못

 

 

 

정신 바짝 차리며 살라고

못이 구부러진다구부러지면서

못은 그만 수직의 힘을 버린다

왜 딴생각하며 살았냐고

원망하듯 못이 구부러진다

나는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살아보자고 세상에 박히다

다들 어디쯤에서 구부러졌을까

망치를 돌려 구부러진 못을 편다

여기서 그만두고 싶다고

일어서지 않으려 고개를 들지 않는 못

아니다아니다그래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정신을 놓을 때도 있지 않겠냐고

겨우 일으켜 세운 못대가리를 다시 내려친다

그래삶은 잘못 때린 불꽃처럼

짧구나너무 짧구나

가까스로 세상을 붙들고

잘못 때리면 아직도 불꽃을 토해낼 것 같은

구부러져 녹슬어가는 못






2.jpg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3.jpg

송찬호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4.jpg

조정인문신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였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5.jpg


고운기익숙해 진다는 것

 

 

 

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밧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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