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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그래, 다시 봄
게시물ID : lovestory_876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5/20 08:22:0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G97vN2oiZG8






1.jpg

신경림소백산의 양떼

 

 

 

소백산자락의 목장에서 양떼를 모는 개는

이상하게도 영어만 알아듣는다

뒤로 가 하면 우두커니 섰다가도

고백 하면 재빨리 천여 마리 양떼 뒤로 가 서고

몰아라 하면 딴전을 피우지만 캄온 소리엔 들입다 몬다

미국서 훈련받은 개들이라 날쌔고 영악하기 사람 뺨쳐

양치기들은 종일 시시덕거리고 장난질이나 치며

몇 마디 영어로 명령만 하면 된다

 

모르고 있었을까 정말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까

영어만 알아듣는 개한테 쫓기는 것이

양떼만이 아니라는 걸

우리들 울부짖음에는 눈만 멀뚱거리다가도

캄온 하는 명령에는 기겁을 해서 양떼를 몰고

스톱 하고 호령하면 목숨을 걸고 세우는 것이

개만이 아니라는 걸

또 개를 영어로 부리며 시시덕거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양치기만이 아니라는 걸

마침내 영어만 알아듣는 개라야

두려워하게 된 것이 양떼만이 아니라는 걸








2.jpg

이시영저녁에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고

이 가을 은행나무는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느라고

아주 잠시 기우뚱거리다







3.jpg

전태련그래다시 봄

 

 

 

고목나무에 움이 트나

죽은 듯 마른 나무 등걸에

물오르는 소리 난다

메마르고 메말라

한 번 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어여쁜 꽃망울 찾아왔으면

마음속으로 딱 한 번 뇌었는데

이런 기도엔 그처럼 귀 밝은 체하시는 하느님

스물스물 물기 고인다

한 번 만난 사람은 언젠가 꼭 다시 만난다는

귀기 서린 그 말 믿은 건 아닌데

느닷없이 놓여진 오작교

이 다리를 건너 너에게 가랴

그 다리를 건너 네가 오려는가

그래다시 한 번






4.jpg

정호흔적

 

 

 

서암(西庵)스님이 열반에 들었다

 

스님사람들이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정말 한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달리 할 말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냥 그렇게 살다 갔다고 해라

그리고는 홀연 입적했다 문경 봉암사 염화실(拈花室)에서

그 절명의 순간 절골 만삭인 진달래들

망울 터뜨리는 소리조차 죽였다

수행이 깊으면 저리도 깨끗한가

다비(茶毘때에도 사중(四衆)이 운집한 절 마당에

사리 한 과 남기지 않았다

 

부끄럽구나 내 이름자 위에

시 한 편 남기는 일

일평생 부질없는 일







5.jpg

박남철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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