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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아침을 닮은 아침
게시물ID : lovestory_891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19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1/04 23:53:0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08NBavS36fU






1.jpg

김민철아파트를 펼쳐보는 시간

 

 

 

저수지가 메워지고

그 자리에 15층짜리 아파트가 세워졌다

저녁이면 노을이 아파트 유리창마다 저수지를 그린다

태양이 수평선에 턱을 괴고 긴 하품을 하고

낮부터 햇살에 취한 갈대들이 자꾸만 비틀거린다

갈대 그림자 뒤에 숨은 작은 오소리들은

가끔 열리는 창문 안으로 숨어 이른 잠에 빠지면

수면 위에 콧구멍만 내민 채 철새를 기다릴지 모른다

유리창에 벤 물살은 성에를 따라 서서히 지워지고

별빛은 자동차 매연에 묶여 지하주차장으로 끌려갔는지

하릴없는 CCTV만 외로운 어둠을 샅샅이 뒤진다

물푸레나무 같은 아파트

머리 위로 철새들이 달집을 향해 날아간다

몇몇은 저수지 정류장이 고여 있다는 착각으로

유리창에 발을 담그다 물갈퀴가 찢어지기도 하고

몇몇은 아파트 머리 위에 둥지를 몰래 틀고

물고기가 지나간 밤하늘을 읽어보고 싶어한다

내일이면 이 쓸쓸한 아파트는

신문의 경매 페이지에 분양될 것이다

저수지는 이제

누구나 와서 펼쳐볼 수 있을까







2.jpg

박정원사라진 우주

 

 

 

막 깨어난 애기나비가 뭉클

나무만 보고 걷던 나를

꼼짝 못하게 묶는다

어쩜 저리 여린 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소란스런 쪽으로 흰뺨박새가 유유히 사라진다

한세상이 오다가 빤히 내 보는 앞에서 쓰러진다

먼저 살아 본 이파리들이

애기나비와 박새를 번갈아 내려다보는 층층나무아래

박새일까 쇠박새일까 진박새일까 되뇌어보는

그 짧고 짧은 사이







3.jpg

이난희그늘의 뿌리

 

 

 

빛이 조금 모자랐을 뿐입니다

신발 한 짝공터처럼 앉아 있습니다

공터의 그늘이 나머지 세상처럼 단단합니다

바닥은 바닥의 생을 두고 잠시 생각합니다

그늘이 오가는 공터에서

그늘은 잠시 몸을 숨겨도 괜찮습니다

 

지척에서

빛의 알갱이들은 더 많은 빛을 만드느라 분주합니다

 

어둠의 속살은 어떤 모양으로 세상에 걸어 나올까요

내가 잠들었을 때

하얗고 찐득한 울음이 다녀갔다는 걸

반쪽 얼굴이 된 낮달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쳐간 생각들

어디로 가 닿았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꼭꼭 숨어라

돌아오지 못하는 당신은

항아리 속에 들어간 어둠을 품고 술래가 됩니다

 

그늘 넓은 팽나무 잎 층층이 쌓이는 소리에

저 너머 바람이 불끈제 힘줄을 잡아당깁니다

 

조금 모자란 빛을 지지대 삼아 다시 오는 저녁이 몸을 엽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쪼그리고 앉아 모여드는 그늘을 맞이합니다







4.jpg

윤강로바람 부는 날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만을 보면서

오래오래

기다려 보았나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로

세상에 매달려 보았나

바라보는 눈매에 추워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에 시달려 보았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이 되어 스친 것들을

잊어 보았나

삶이 소중한 만큼

몇 개의 마른 열매와

몇 잎의 낡은 잎새를

사랑해 보았나







5.jpg

박연준아침을 닮은 아침

 

 

 

지하철 환승 게이트로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눈 먼 나귀처럼 걷다가

 

귀신을 보았다

저기 잠시 빗겨 서 있는 자

허공에 조용히 숨은 자

무릎이 해진 바지와 산발한 머리를 하고

어깨와 등과 다리를 잊고 마침내

얼굴마저 잊은 듯 표정 없이 서 있는 자

 

모두들 이쪽에서 저쪽으로

환승해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는 소리를 빼앗긴 비처럼

비였던

비처럼

빗금으로 멈춰 서 있었다

 

오늘은 기다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지금을 잊은 게 아닐까

 

어제의 걸음엔 부러진 발목과

진실이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한 마디쯤 멀리 선 귀신을 뒤로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눈먼 귀신들

 

오늘 아침엔 아무도 서로를 못 본 체

모두가 귀신이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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