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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게시물ID : lovestory_894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2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2/21 09:31:53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pvZSiQXHL_E






1.jpg

김안동지(冬蜘)

 

 

 

밤이고

밤이면 길바닥마다 거미가 집을 짓는 계절이다

나는 쭈그려 앉아 투명한 거미집을 부순다

양손 가득 찢겨진 거미집을 묻힌 채

얼굴을 감싸면 달이 떠오르는 소리 들린다

타원형의 긴긴 달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아이들이 가슴팍에 부엌칼을 숨긴 채

숨 가삐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는 계절이다

머리에서 달을 닮은 뿔이 자라나고

술에 취한 가난한 아비들이 밤마다 거미집에 걸려 전화하는 계절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아비들의 목소리가 해가 뜨고 나서야 시반(屍班)처럼 퍼지는 계절이다

손가락 끝으로 거미의 배를 누른다

거미는 몽당연필처럼 작아지고

손가락 끝이 파랗게 언다

손가락이 솜사탕보다 맛나던 계절이다

자꾸만 손가락이 없어지던 계절이다

온종일 방이 없는 집에 웅크려 있던 사람들도

慙愧하며 구름을 생산하는 계절이다







2.jpg

최서진거울 속으로 사라진 나비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나비처럼거울 밖에서 나는 두렵다

암호 같은 바깥에서 모서리를 버린다

대부분의 모서리는 자기 자신 되기

자신을 버린 나는 거울 뒤에 숨는다

이곳은 비극적인 세계

 

거울 밖에서 거울 속을 앓는 밤

 

신탁처럼 도착한 편지를 읽고

상실의 자세로 하루를 견딘다

극적으로 성장하는 허공들

혁명의 나비는 다시 날지 않는다는 전언을 듣고

위태로운 허공은 깊이를 배운다

거울의 안과 밖

우리는 난해한 경계에서 단정하고 냉정하다

 

나비는 거울 속에서 기적처럼 날 수 있을까

 

맨손으로 거울을 만지면 손가락이 베이는

절단의 벽수락해주지 않는 거울의 내부로 잘린

손가락이 툭 떨어진다

 

나비와 손가락을 남기고 뒤돌아서는 저녁마다

잘린 손가락 마디에서 모서리가 한 뼘씩 자란다







3.jpg

서덕민월식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눈과 코와 입과 표정이 없다 해도

오랫동안 누군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내 상대의 그림자가 얼굴에 묻어나기 시작한다

어떤 얼굴은 지구의 그림자보다 크고 짙은 슬픔으로

그대의 얼굴을 잠식해나갈 것이고

밤하늘에 선명하게 파인 달의 궤도라도 지울 것처럼

그대의 익숙한 길을 어둠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어김없이 자신의 어둠을 달에 던져준다

이 땅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

그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그림자 속을 지나며

밤하늘의 모든 별 빛나게 할 만큼

밀도 있는 어둠을 만드는 일 아닌가

그렇게 따듯하고 밝은 그대의 어둠을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다시 드리우는 일 아닌가

지구의 그림자 속을 드나드는

고집스레 파인 달의 궤도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우리가 지나야 할 길은 어차피

누군가가 뿌린 눈물로 이미 눅눅해진 길 아닌가







4.jpg

이장욱기념일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사라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들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5.jpg

이수명줄넘기

 

 

 

줄넘기를 하고 있다

지면을 넘기며

지면 위에 선다

발아래 지면이 팽창될수록

망각이 깊어져

다른 페이지 속으로 섞여 들어간 거짓말들처럼 두 발은 부드럽게 흩어질 뿐

들러붙은 손

하나 둘 셋 심장을 후려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금 보이지 않는 폭음을 들어 올리는 자는 누구인가

폭음은 어디로 가는가

줄넘기를 하고 있다

줄 속에 들어가

구부러지는 줄

망각이 깊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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