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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마드모아젤 사강 (13) ㅡ19금 절때로 아님.
게시물ID : lovestory_895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낭만아자씨
추천 : 2
조회수 : 69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10 19: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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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이 답답한 시기에 이런 시답잖은 글을 연재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더. 
***
   《연재》
  아듀, 마드모아젤 사강 13



 나는 쌀도둑이 되기로 했다. 말이 도둑이지 우리집의 쌀을 갖고 가는 것이라 큰 죄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들키면 곤란을 당하게 될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런 일로 나를 영 죽이지는 않으리라 믿었고, 누나보다는 나를 백 배는 더 사랑하는ㅡ쌀독의 관리자인 엄마는 알고도 눈감아 주리라 믿었다. 쌀은 아버지와 누나만 맞닥뜨리지 않으면 오래도록 내 부족한 용돈에 보탬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쌀도둑질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매주 토요일에 집에 가면 누나와 아버지의 눈치를 봐가면서 쌀을 퍼담은 자루를 자전거로 버스가 지나가는 오 리는 족히 되는 마을에 사는 친구 두식이ㅡ두식이는 기서농고에 다녔다ㅡ의 집에 갖다 놓고, 일요일에 버스에 싣고 가서 무포의 쌀집에 팔아먹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 수입원이 벼농사인 집에서 무한정 팔아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 늘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와 누나의 눈치를 보느라 실패한 때도 많았다. 그래서 내 살림은 늘 쪼들렸다.

 학교를 벗어나면 사복패션이 내 삶의 원칙이었지만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향할 때는 교복이나 교련복을 입어야 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누나에게 내 깔끔하고 세련된 사복을 보였다간 자금의 출처를 추궁당할 것이었고, 아버지가 알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리고 깔끔한 패션으로 무거운 쌀자루를 낑낑거리며 안거나 지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면 더 창피할 것 같았다.  

 무포에선 버스에서 내려서 10분쯤 걸어야 학교고, 학교에서 또 20분 정도의 거리에 내 자취방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 쪽으로 조금 가면 길 양쪽에 쌀집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집과 거래를 할까, 저집과 할까를 머리를 굴렸지만 두 집이 담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아무 집에나 마음 내키는 대로 줘버렸다. 어차피 시중 매매가의 절반 정도 가격이었다. 

 쌀을 팔아먹는 넘이 나만은 아닌지 쌀집엔 크고, 작고, 모양도 다른 비규격(?)의 쌀자루들이 널부러져 있곤 했는데, 그때 나는 먹고 사는 일이 진정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배웠다. 두 쌀집 모두가 한 번도 쌀을 그냥 사는 법이 없었다. 일일이 부어서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쌀의 품종을 확인하고, 품질이 균일한가를 확인하고, 돌과 뉘가 얼마나 섞였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깎으려 드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옆집에 갖다 주겠다고 엄포를 놓으므로써 쌀가게 아저씨 또는 아줌마의 꼼수를 무산시켰지만 나보다 덜 절박하고, 더 어리숙한 넘들은 그냥 줘버리고 말았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쌀을 팔 때마다 이 세상은 쌀집 주인들처럼 그렇게 철두철미하고 냉정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란 걸 알아 갔다. 그리고 부모님이 애써 농사 지으신 것을 헐값의 장물로 만들어 버린 데 대한 죄책감에 한참씩을 우울해야 했다. 나는 부모님의 노고를 외면하는 상놈이 돼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또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럴수록 막내누나에 대한 원한은 깊어져만 갔다.  

 나는 엄마에게 절대로 내 자취방이 어딘지 누나에게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다. 미워서이기도 했지만 누나가 내 옷들을 본다면 난리가 날 것이었다. 엄마는 이미 나의 행각(?)을 대충은 눈치챈 것 같았지만 누나는 경우가 달랐다.

 “와?”

 엄마가 물었다. 나는 그러면 분명히 ‘친구들과 놀다보니 막차를 놓쳐서 내 방에서 자고 왔다’고 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간이 커져서 나중엔 제대로 바람이 날 수도 있다, 고 은근히 암시했다.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엄마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누나는 내 자취방에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다. 대강 어느 동네에 있다는 것은 짐작했겠지만. 

 그렇게 궁핍한데도ㅡ누군가는 그게 뭐가 그리 궁핍한 것인가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라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는 말할 수 없이 곤궁했다는 것이다ㅡ 왜 연애편지는 현금이 아니고, 짜장면이나 빵만 얻어먹는 것으로 끝냈을까? 

 나중에 알게 된ㅡ학창시절에 글깨나 써서 연애편지 대필깨나 해 준 사람들 거의 전부가 현금으로는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돈을 받는 것은 거시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다들 시답잖은 글을 파는 행위(賣文)는 자랑스러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온다면 내가 쓴 연애편지를 현금으로 팔고 싶다. 현금우대로 가격도 인하하고, 1+1이라도 하고 싶다. 그때, 나는 그만큼 곤궁했다.  

 그런 중에도 날들은 쉬임 없이 흘러갔다.


    ㅡ14편에서 계속됩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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