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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게시물ID : lovestory_896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1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25 08:32:0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pvZSiQXHL_E






1.jpg

도종환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2.jpg

이상국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 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3.jpg

길상호감자의 몸

 

 

 

감자를 깎다 보면 칼이 비켜가는

움푹한 웅덩이와 만난다

그곳이 감자가 세상과 만난 흔적이다

그 홈에 몸 맞췄을 돌멩이의 기억을

감자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벼랑의 억센 뿌리들처럼 마음 단단히 먹으면

돌 하나 깨부수는 것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뜨거운 하지의 태양에 잎 시들면서도

작은 돌 하나도 생명이라는

뿌리의 그 마음 마르지 않았다

세상 어떤 자리도 빌려서 살아가는 것일 뿐

자신의 소유가 없다는 것을 감자의 몸은

어두운 땅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보니 그 웅덩이 속에

씨눈이 하나 옹글게 맺혀 있다

다시 세상에 탯줄 댈 씨눈이

옛 기억을 간직한 배꼽처럼 불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독을 가득 품은 것들이라고

시퍼런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4.jpg

도종환들일

 

 

 

들일을 다니며 가을 한 철 보냈다

뒷주머니에 찔러 주던 백 원짜리

환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

니코틴 색으로 손에 배는 고적한 피로

콩과 깨를 거두고 무 두 접 뽑아 묶어

얼지 않을 땅에 묻고 땀을 닦으며 일어서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의 노역

베고 또 베어 버려도 벌판은 남아 있고

지난날의 쓸쓸함도 거기 어디 남아 있고

등에 얹은 볏가마니는

지고 가야 할 나이보다 무거웠다

먼지를 털며 올려다보는 새털구름 밑으로

하늘은 배고픔처럼 어두워오는데

시간은 나를 앞질러 갈 만큼 간 걸 알겠다

돌아오는 거리에서 마른 구역질을 하고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펴곤 했다

내일은 소장수 백씨네 아랫텃논

마당질을 끝내러 가야 한다

호박잎을 걷어낸 양철지붕 위에서

바람이 떼를 지어 붉은 녹을 걷어차며

종점 빈터로 몰려가는 늦가을 저녁







5.jpg

박라연치사량의 독그리고

 

 

 

지독한 꿈의 냄새에 취해버린 몇 년

몽사(夢死)할 수 없어 깨어난다

누운 채로 밤새워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

그 길에서 만난 세월

이름 모를 분홍색 꽃잎 사이사이

검은 나비가 꽃잎을 빨고 있다

내 몸 가득한 꿈의 냄새가 빠져나간다

한 아비의 마당에

한 어미의 옷섶에 뚝 신문 떨어지는 소리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송이들

너희가 우리를 취하게 했구나

 

삶은 때로 진부해서 살 만하고

꿈은 때로 지독한 제 몸 냄새로 죽음을 밀어낸다

허약한 일상들은

꿈의 갈비뼈 사이에서 잠이 들고

초 분 시간을 따라 송이송이 꽃이 된다

누군가의 미숙한 사랑이 되고

지상의 하루가 되고 전생이 되고 전생애가 된다

치사량의 독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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