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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일몰을 믿을 수 없다
게시물ID : lovestory_897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가입:2012-11-15 방문:1651)
추천 : 2
조회수 : 1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4/08 08:14:0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bQpcUCn16CY






1.jpg

이난희이상한 풍금

 

 

 

바람이 절뚝거리며 올라서는 음의 계단을 본다

 

언젠가 죽은 참새가 난처한 얼굴로 드나든다

과자를 주는 손이 없다고 코끼리 아저씨는 등을 비벼댄다

새 집을 짓지 않는 두꺼비 울음이 걸어와 앉기도 한다

간혹 계단 끝에서 종이비행기가 떴다눈처럼 찢어져 날리기도 했다

 

바람은 왜 자꾸 한곳으로 몰려들어

나뒹굴다 돌아서는 것일까

누군가 돌아온다면 흰 손가락을 뻗어 검은 침묵을 뚫게 될까

 

먼지 낀 창밖으로 낮달이 기웃거린다

 

조금씩불길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로 페달을 헛딛는 바람







2.jpg

류시화되새 떼를 생각한다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바람을 신으로 모신 유목민들을 생각한다

별들이 길을 잃을까 봐 피라미드를 세운 이들을 생각한다

수백 년 걸려

불과 얼음을 거쳐 온 치료의 돌을 생각한다

터질 듯한 부레로 거대한 고독과 싸우는 심해어를 생각한다

여자 바람과 남자 바람 돌아다니는 북극의 흰 가슴과

히말라야 골짜기 돌에 차이는 나귀의 발굽 소리를 생각한다

생이 계속되는 동안은 눈을 맞을 어린 꽃나무를 생각한다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오두막이 불타니 달이 보인다고 쓴 시인을 생각한다

내 안에서 퍼붓는 비를 맞으며 자라는 청보리를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보다

사랑하고 상처받는 사람을 생각한다

불이 태우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심장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깃 가장자리가 닳은 되새 떼의 날갯짓을 생각한다

뭉툭한 두 손 외에는 아무 도구 없이

그해의 첫 연어를 잡으러 가는 곰을 생각한다

새의 폐 속에 들어갔던 공기가 내 폐에 들어온다는 것을 생각한다

잘못 살고 있다고 느낄 때

겨울바람 속에 반성문 쓰고 있는 콩꼬투리를 생각한다

가슴에 줄무늬 긋고서 기다림의 자세 고쳐 앉는 말똥가리를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면서

둥근 테두리가 마모되는 동전을 생각한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곳에 왔음을 생각한다







3.jpg

권현형일몰을 믿을 수 없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

꺼진 그의 마음을

캐묻는 대신 소매 끝으로 전동차의 유리창을 닦는다

팔이 접혀지는 안쪽에 통증이 살아난다

 

눈이 큰 짐승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처럼

여름 저녁의 짧은 철로는 윤곽이 뚜렷하다

저녁 여섯 시 오렌지 빛 잔광 속에 물끄러미 있다

 

찻물 끓이는 주전자가 엎질러진 오래전 저녁

팔뚝 안쪽의 눈꽃 무늬 상흔은

저 절단된단절된 협궤열차의 팔뚝에

그리고 목요일의 오후에 걸쳐져 있다

금속성의 이가 시린 그것

 

내게 질문하고 싶다

아직도 사랑을 꿈꿔?

사람들은 일제히 가마우지 떼처럼 수면 가까이

유리창 가까이 붙어 서서 일몰을 내다보고 있다

 

뒷모습에 너무 많은 표정이 담긴 자를 믿지 않는다

일몰을 믿지 않는다

그저 사라지고 나는 물끄러미 있다







4.jpg

이병률아주 오래 천천히

 

 

 

떨어지는 꽃들은 언제나 이런 소리를 냈다

 

순간

순간

 

나는 이 말들을 밤새워 외우고 또 녹음하였다

소리를 누르는 받침이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그 받침이 순간을 받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새벽에 나는 걸어

어느 절벽에 도착하여

그 순간순간의 ㄴ들이

당도할 곳은 있는지

절벽 저 아래를 향해 물었다

 

이번 생은 걸을 만하였고

파도도 참을 만은 하였으니

태어나면 아찔한 흰분홍으로나 태어나겠구나

그렇다면 절벽의 어느 한 경사에서라면 어떨지

 

그리하여 내가 떨어질 때는

순간과 순간을 겹겹이 이어 붙여

이런 소리를 내며

 

순간들

순간들

 

아주 아주 먼 길을

오래 오래 그리고 교교히 떨어졌으면







5.jpg

박정대시인박멸

 

 

 

어떤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도 없이 촬영에 들어갔다

훌륭하다어떤 시인은 제목 없이 시를 쓴다

역시 훌륭하다그러나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시가 있듯

제목만으로 완성되는 삶도 있다

제목이 부실하다는 것은 삶이 부실하다는 것

오늘은 그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삶의 제목으로 삼아라

삼나무에서 삼나무 이파리가 자라듯

제목으로부터 삶이 자란다

고독이 분란을 일으키는 삶은

선반 위에 올려두어라

싸늘한 겨울 오후

난롯가에서 그대 시를 쓴다면

제목을 커피와 담배라고 하자

그 모든 성분은 삶으로부터 온 것일지니

커피와 담배의 시는 삶의 시다

담벼락과 마주한 그대 삶의 시를 보아라

처음부터 완성된 시는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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