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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모두 다 나를 지우는 일이다
게시물ID : lovestory_905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0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9/09 19:30:2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정한용, 그건 당신 때문이야




나무들이 건네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빗방울이 돌에 부딪혀 이름을 새기는 것도

이젠 낯설고 먼 일이 되었다


나무 끝에 찔려 꼼짝 못 하는

저 흰 구름과의 대화도 수천 년 전이다

내가 들은 모든 소리와 빛은

둥글게 말리고 완고하게 굳어져

작은 폭탄처럼

내 몸 풀어질 때 함께 터져버릴 준비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세월 가고

옛날은 남았지만

밀어들은 모두 흩어져 납작하게 눌어붙어

드디어는 흙이 되었다

없는 것이 되었다


물방울처럼 맑고 여려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지금

새봄, 땅에 뿌렸던 씨앗들이 공기를 뚫고 나올 때

그 곁에 다시 앉아볼 수 있겠다

나무와 돌, 아니

모두 다 나를 지우는 일이다

 

 

 

 

 

 

2.jpg


오세영, 세상은




누굴 사랑했던 게지

화사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혈색

까르르 세상은 온통 꽃들의 웃음판이다

누굴 미워했던 게지

시퍼렇게 얼어붙은 그녀의 낯색

파르르 세상은 온통 헐벗은 나무들의 울음판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만 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미움도 사랑도 버려야만 산문(山門)에 든다 하건만

노여움도 슬픔도 버려야만 하늘문 든다 하건만

먼 산 계곡에선 오늘도 눈 녹는 소리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더란 말인가

흐르는 물 위엔 뚝뚝

꽃잎만 져 내리고

 

 

 

 

 

 

3.jpg


정영주, 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




봄이 가려운가 보다


엉킨 산수유들이

몸을 연신 하늘에 문대고 있다

노란 꽃망울이 툭툭 터져 물처럼 번진다


번져서 따스히 적셔지는 하늘일 수 있다면

심지만 닿아도 그을음 없이 타오르는

불꽃일 수 있다면


나는 너무 쉽게 꽃나무 곁을 지나왔다

시간이 꽃보다 늘 빨랐다


오랫동안 한 곳을 보지 않으면

그리고 그 한 곳을 깊이 내려가지 않으면

시가 꽃이 되지 못한다


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가 더 많아

그 그늘이 더 깊어

 

 

 

 

 

 

4.jpg


전봉건, 물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 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 합니다

샘이나 늪 못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강이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습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시월 어느 날 혹은 오월의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얼음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 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5.jpg

 

윤동주,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 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 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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