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08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51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11/16 23:06:35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기형도, 10월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2.jpg

 

원태연, 이상한 눈물




영화를 보았지

슬픈 영화라 해서

보기 전부터 슬픈 마음먹고 보았지

슬펐지

주인공이 너무 안됐다 싶었지

그러다 이상했지

눈물이 없었기에

나만 없었지

한참을 모두 슬퍼했지

그리고 나왔지

다른 입장객을 위해

모두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이야기를 했지

모두 눈물을 달랬는데

나만 슬펐지

나 혼자만 눈물이 있었지

 

 

 

 

 

 

3.jpg

 

차창룡, 고시원에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한때는 야망을 품고 이곳에 왔고

한때는 갈 데가 없어 이곳에 왔으나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가족들을 잊기 위해 산다

가족들을 잊지 못해 산다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기 위해 산다


헤어짐이란 고시와도 같은 것

나는 날마다 고시 공부하듯 결별의 책을 읽는다

벽마다 책이 쌓여서 무너질까봐

그 위를 무거운 책으로 눌러놓고는


나를 포위한 책 속에서 행복하다

책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는

책으로 만든 장작불이야말로

최고의 다비식을 제공할까


바람이 많은 곳이어서 바람은

혹은 바람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없는 바람마저 뼛속을 누빈다

뼛속을 빼고는 관속처럼 아늑하여라

창문 없는 내 방이여


참 이상하다 사람이란

바람을 피해 바람이 없는 방을 찾더니

바람이 그리워 방을 옮기는 사람이란

바람을 배반하고는 바람에게 배반당하리


옮기자마자 북쪽으로부터 바람이 몰려온다

고립의 성채를 두드리는 바람 두려워

나는 확 창문을 닫는다

바람과 함께 들어오던 삼각산이

유리에 이마를 부딪쳐 푸른 피를 흘리는데도

 

 

 

 

 

 

4.jpg

 

윤동주, 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狂風)이 휘날리는

북국(北國)의 거리

도시(都市)의 진주(眞珠)

전등(電燈) 밑을 헤엄치는

조그만 인어(人魚)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灰色) 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 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空想)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5.jpg

 

박인환, 구름




어린 생각이 부서진 하늘에

어머니구름 작은 구름들이

사나운 바람을 벗어난다


밤비는

구름의 층계를 뛰어내려

우리에게 봄을 알려주고

모든 것이 생명을 찾았을 때

달빛은 구름 사이로

지상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새벽 문을 여니

안개보다 따스한 호흡으로

나를 안아 주던 구름이여

시간은 흘러가

네 모습은 또다시 하늘에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전형

서로 손잡고 모이면

크게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괴로움으로 흘러가는 구름

그러나 자유 속에서

아름다운 석양 옆에서

헤매는 것이

얼마나 좋으니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