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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당신이 밤의 상점을 지나갔다
게시물ID : lovestory_909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38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11/22 17:24:3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장욱, 토르소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이 밤의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2.jpg

 

문정희, 서울에서 온 전화




심야에 서울에서 온 전화가 소리 지른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누구는 깜짝 새 아파트로 몇 억을 벌었다는데

날마다 차는 밀리고 공기는 더러워 숨이 막힌다

텔레비전은 더욱 시끄럽고 천해져 가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 그것만 들여다보고 산다

거짓말과 거품만 자욱한 도시

시인들조차도 아무 말이나 끌어다 쓰고

이리저리 골목대장 따라 몰려다닌다

취기를 상징적 장신구로 달고 다니지만

그것은 작은 양심이요 알리바이일 뿐

심지어 관객들도 모두 무대로 올라와

맹목적 출세주의에 발을 구르며

오직 뜨려고 발광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해졌고 상도 받았지만

손바닥이 얼얼한 박수를 쳐본 적은 드물다

멈추면 폭발하는 고장 난 버스처럼

지금 서울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그, 러, 고, 보, 니

행복이란 참 어렵구나

“왜 그의 행복은 언제나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것이

심지어 불행이고 패배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

전화를 끊고 나는 당장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의 괴로운 행복과

나의 외로운 행복이 결혼을 하여

새로 아이가 태어나면

진짜 시인이 될 것 같았다

광기의 속도로 내닫는 서울이 불현 듯 그리워서

나는 밤새 가방을 쌌다

 

 

 

 

 

 

3.jpg

 

김종삼, 원두막




비바람이 훼청거린다

매우 거세이다


간혹 보이던

논두락 매던 사람이 멀다


산마루에 우산

받고 지나가는 사람이

느리다


무엇인지 모르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


머지않아 원두막이

보이게 되었다

 

 

 

 

 

 

4.jpg

 

박형준, 입술




봄날 대낮

공기의 서랍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냄새 맡아요

따끈하게 데워진 술이

이슬로 내리는 햇살 사이 걸어갈 때

입술로만 말을 해봅니다

미래의 문들이 달린 창공을 향해

뿔나팔을 분답니다

가냘픈 바람의 허리를 붙잡고

당신의 귀밑에 부어넣어지는

밀어의 전언을 느껴보세요

거리를 향해 심호흡을 하고

조율한 휘파람을 날려보냅니다


당신의 옷자락에 살랑이는

입술의 언어를 느껴보세요

 

 

 

 

 

 

5.jpg

 

이태수, 못물을 보며




못물을 바라보면

물 속 깊이 별 하나 눈을 뜬다

흐르지 못하고

조금씩 뒤채일 뿐인 나의 말이여

비쩍 마른 네 겨드랑이에

은밀하게 날개를 달아 보기도 하지만

부질없구나. 부질없구나

못둑의 부들들은 부들부들 떨고

멧새 한 마리 상한 날개를 비비대는 동안

못물이여, 너는 또

꿈 속에서나 흐르고 흐르면서

바다에 이를 것인가, 하늘로 오를 것인가

입 언저리에 말라붙은 나의 말들은 이 밤

눈감고 바다에 가 닿고

하늘에 이르고

별에 몇 개, 찬 바람에 이마 조아리며

빛을 섞는다

괴어 있는 내 마음, 괴어서

조금씩 뒤채일 뿐인 못물이여

지워지지 않는 별 하나 눈뜬 채

저토록 아프구나. 아프구나

바람불고 밤은 깊어 가고, 못물은

깊이깊이 뒤채이며 멍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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