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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게시물ID : lovestory_909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7
조회수 : 54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11/25 20:24:5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신동집, 악수




많은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죽어갔고

죽지 않는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살아왔고

그리하여 서로들끼리

말 못할 악수를 한다

죽은 사람과

죽지 않고 남은 사람과


악수란 오늘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나의 한 편 팔은

땅 속 깊이 꽂히어 있고

다른 한 편 팔은

짙은 밀도의 공간을 저항한다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를 그리워하며

살은 사람이 죽어 갈

때를 그리워하며

 

 

 

 

 

 

2.jpg

 

이근배, 송광사에 와서




아직도 흐르고 있느냐

조계산이 온몸으로 끌어안던

밤의 살 냄새를 다 씻지 못하고

물소리는 저대로 치닫고만 있느냐

피가 비칠세라

뼈가 드러날세라

사랑은 숨죽여 안개속에 묻히더니

그 입덧은 자꾸 기어나와

국사전 뒤뜰에 부스럼 같은

상사화로 피어났구나


눈에 보이는 것도

본래는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름이야 열 번 백 번

바뀐들 어떠랴

산에 오면 나도

산이 되어야 할 텐데

감로탑 앞에 서면 나도

머리 깎은 돌이 되어야 할 텐데

왜 내겐 물소리뿐이지


저 삐죽삐죽한 상사화들이

내 잃어버린 사랑으로 보이지

왜 나는 물소리가 되지 못하지

헛것들에게 갇혀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있지

 

 

 

 

 

 

3.jpg

 

박영근, 인제를 지나며




인제 산촌(山村) 어디쯤인가 지나는데

눈보라가

외딴집 한 채를 비켜가네


거기서 나는 보느니

눈 맞으며

눈 맞으며

마당가 빈 나무 밑을 서성대는

누렁이 한 마리

훗날

먼 데

내 모양일레


지게문을 열고

머릿수건을 쓴 늙은 어머니

흰빛만 쌓여가는 마당을 물끄러미 내다보네

 

 

 

 

 

 

4.jpg

 

유경한, 산노을




먼 산을 호젓이 바라보면

누군가 부르네

산 너머 노을에 젖는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산울림이 외로이 산 넘고

행여나 또 들릴 듯한 마음

아아, 산울림이 내 마음 울리네

다가오던 봉우리 물러서고

산 그림자 슬며시 지나가네


나무에 가만히 기대보면

누군가 숨었네

언젠가 꿈속에 와서

내 마음에 던져진 그림잔가

돌아서며 수줍게 눈감고

가지에 숨어버린 모습

아아, 산울림이 그 모습 더듬네

다가서던 그리움 바람되어

긴 가지만 어둠에 흔들리네

 

 

 

 

 

 

5.jpg

 

송찬호,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풀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의 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 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 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더욱 낯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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