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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그대가 병을 이기지 못하였다
게시물ID : lovestory_911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39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12/29 12:18:36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강형철, 도선장 불빛 아래




백중사리 둥근 달이

선창 횟집 전깃줄 사이로 떴다

부두를 넘쳐나던 뻘물은 저만치 물러갔다

바다 가운데로 흉흉한 소문처럼 물결이 달려간다

꼭 한번 손을 잡았던 여인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뜨거운 날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할 수 없는 곳을 통과하는 뻘물은 오늘도 서해로 흘러들고

건너편 장항의 불빛은 작은 품을 열어 안아주고 있다

포장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서며

긴 로프에 매달려 고개를 처박고 있는 배의 안부를 물으니

껍딱은 뺑기칠만 허믄 그만이라고

배들이 겉은 그래도 우리 속보다 훨씬 낫다며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묻는다

생합, 살밑에 고인 조갯물 거기다

한 잔 소주면 좋겠다고 나는 더듬거린다

물 젖은 도마 위에서 파는 숭숭 썰려 떨어지고

부두를 덮치던 파도는 어느새

백중사리 둥근 달을 데리고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선다

 

 

 

 

 

 

2.jpg

 

김혜순, 벼랑에서




내 어깨를 타넘은 바람이

발 디딜 곳을 못 찾고

창졸간에 허방에 빠진다

급히 불려오느라

머리 위로 치마도 뒤집어쓰지 못한 바람이

저 아래 바다로

다 쏟아져 들어간다

왼종일 손가락 들어

이곳으로 오는

길을 가리키던

햇빛도 여기까지 와선 허방에

단숨에 허방에 빠진다

 

 

 

 

 

 

3.jpg

 

김명인, 그대의 말뚝




그대가 병을 이기지 못하였다, 병한테 손들어 버린

그대를 하직하고 돌아오는 십일월 길은

보도마다 빈손으로 허공을 어루만지며 낙엽이

한꺼번에 져 내렸다

나는, 문상에서 이미 젖어 저 길 어디에

오래도록 축축할 그대의 집을 바라보았다, 거리

모퉁이에는 낙엽을 태우는 청소부들 몇 명

지상의 불씨를 그대가 불어서

결코 다시 키울 수 없는 저 모반의 모닥불 가까이

그대의 경작이 없다, 그러니 경자유전의 밭들은

이제 밤 되면 하늘 속으로 옮겨지고 잡초처럼

별들 돋아나서 반짝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말 매어 둘 일 많아 그 일 중 하날

그대와 내가 지킨다고 하였으나

인적 그친 아파트의 공터를 가로지를 때 나는

내 말뚝에도 이미 매어 둘 말이 없음을, 너무 허전하여

마음속으로만 울리는 말방울 소릴 듣고

가슴의 빈 구유에서 오랫동안 낡아갈

남은 시절을 생각했다

세상은 이렇게 시들고 마파람 속 홀로 달린다는 것은

갈 곳 아득하여 슬픔의 갈기가 바람을 다해

날린다는 것이냐, 나 혼자는

다 갈 것 같지가 않아 고개 들기가 너무 무거운 날

다시 하늘을 보면 하늘 가득히

빗방울 듣다 말고 듣다 말고 눈발 희끗거리는

그런 날이었다

 

 

 

 

 

 

4.jpg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 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끊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소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5.jpg

 

송경동, 용접꽃




썩지 않는 꽃


안전벨트 하나 매고

70m 베셀 90도 깍아지른 쇠벽에

아로새긴 꽃


440볼트

혼신의 전력을 바쳐

단 일획에 그려져야 하는 꽃


피 튀기며 피었다

일순간 사라지고 마는 이 꽃처럼

살자던 한 굳은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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