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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물 한잔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게시물ID : lovestory_911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35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0/12/31 23:06:16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문인수, 저 할머니의 슬하




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내엔 그러니까 아직도

상처와 기억들이 잘 썩어 기름진 가임의 구덩이가 숨어 있는지

할머니, 손수 가꿨다며 호박잎 묶음도 너풀너풀 흔들어 보인다

 

 

 

 

 

 

2.jpg

 

윤동주, 산상(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벌여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 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던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

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를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

 

 

 

 

 

 

3.jpg

 

최승호, 뭉게구름




나는 구름 숭배자가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4.jpg

 

박철, 친구와 물 한잔




웬만해서 눈물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다

세상살이는 그저 부평초라고 한마디를 했던가

웬만해서가 아니라 친한 벗이 죽었을 때도

슬쩍 손등을 한번 문질러버리고

열심히 천막 밑을 오가던 사람이다

시간 지키기를 제 생명처럼 귀히 여기고

허리가 부러져도 출근을 하던 사람이다

죽지 못해 산다 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일자 무관이던 사람이다

단단하지만 세상은 그를

아둔한 사람이라 했다

정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러던 그가 맑은 물 한잔을 다 마시기 전에

사람 창피하게 울음을 터트렸다

다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30년 넘게 어른 행세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를 버린 부모가 보고 싶다고 했다

어느덧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 친구

여간해서 전화 한통 없던 사람이

먼저 나와 창밖을 내다보고 있더니

물 한잔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5.jpg

 

양문규, 화정(花井)을 떠나며




꽃나무

우물가 꽃나무


영원한 봄날의 꽃나무

꿈속에서도 꽃을 퍼붓던 꽃나무

오로지 하나의 집 위에

향그런 열매를 달던 꽃나무


모진 바람 몰아친다

저 밖의 바람

모스러진 꽃나무 모가지를 꺾고

그 커다란 바윗덩이 우물을 메운다


집을 비운다

모든 것이 일순간


솟구치고 솟구치는 검붉은 피

땅속 깊이 스며

옛 생각 껴안고

나지막하게 엎드려 울 때

저 밖의 바람


꽃나무의 비애 외면하고

화정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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