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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의 취미는 멸망이다
게시물ID : lovestory_911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1/08 22:04:5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윤석위, 시집(詩集)




시집(詩集)을

사는 일은 즐겁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 책을 사다가

모르는 이의

불꽃같은 시가 있는

시집(詩集)을

덤으로 사는 일은 즐겁다

 

 

 

 

 

 

2.jpg

 

이형기, 나의 취미는 멸망이다




학교 주변 그 뒷골목에는

낙첨된 주택복권을 사들이는

가게가 있다


혹시나 혹시나

몰래 숨긴 1억 원짜리 꿈이

역시나 허탕으로 꺼져야만 반기는

심술꾼 가게 주인


군대로 치면

이들은 모두 전사자지요

그러니 다시는 죽을 리 없는

불사의 군대만을 모으고 있지요


과연 그는 백전노장

지고 쫓기는덴 이골이 나서

도주하는 밤길

그 어둠조차도 절망으로 불 밝힌다


이유는 무슨 이유

다만 취미

허망을 위한

꿈 많은 복권 구매자여 들으라

나의 취미는 멸망이다

 

 

 

 

 

 

 

3.jpg

 

길상호, 물끄러미




물끄러미라는 말

한 꾸러미 너희들 딱딱한 입처럼 아무 소리도 없는 말

마른 지느러미처럼 어떤 방향으로도 몸을 틀 수 없는 말

그물에 걸리는 순간

물에서 끄집어낸 순간

덕장의 장대에 걸려서도

물끄러미

겨울바람 비늘 파고들면

내장도 빼버린 배 속 허기가 조금 느껴지는 말

아가미 꿰고 있는 새끼줄 때문에

너를 두고 바다로 되돌아간 그림자 때문에

보아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말

 

 

 

 

 

 

4.jpg

 

남진우, 소음




나도 모르게

벌집을 건드렸나보다

붕붕거리며 날아오른 벌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다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금지된 영지를 침범한 것일까

늙은 떡갈나무 아래를 지나다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뻗치는 순간

먹구름처럼 모여드는 벌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수많은 말들이 거침없이 나를 찔러대며

어서 무릎 꿇으라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다그친다

퉁퉁 부어오르는 살 위에 다시 침을 박는다


개울을 건너 풀숲을 헤치고

아무리 멀리 달아나봐야 소용없다

내가 건드리기도 전에 한 모금 꿀을 맛보기도 전에

벌들이 날아와 나를 쏘아댄다


아픔이 환희처럼 온몸에 번져갈 때

꽃가루를 모으던 닫힌 입 안에 갇혀 있던 말들이

쉴 새 없이 붕붕거리며 어서 쏴버려

쏘아버리라고 말한다


벌들에게 쏘이며

나 또한 입가에 힘을 모으고

최후로 마지막 침을 날린다 이제 막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저 거대한 말벌을 향해


벌이야

벌이라니까

 

 

 

 

 

 

5.jpg

 

우대식, 고래와 시인




저인망 그물에 걸린 고래가 죽었다

익사(溺死)다

그의 몸에 남은 망사스타킹 같은 그물자국에서

선(線)에 관한 몇 개의 보고서를 읽는다

윤리학(倫理學)이 아니다

생의 근친(近親)인 죽음 앞에서

물에 빠져 죽은 고래에 대한 내 명상이 길어질 때

시(詩)에 대해 생각해본 것뿐이다

말(言)의 촘촘한 저인망에 걸려 죽어가는

한 시인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이란

저와 가장 친근한 곳에서 완성되는 법

객사(客死)를 면한 고래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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