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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무슨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게시물ID : lovestory_911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2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1/11 23:27:5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박형준, 빈집




개 한 마리

감나무에 묶여

하늘 본다

까치밥 몇 개가 남아 있다

새가 쪼아 먹은 감은 신발

바람이 신어보고

달빛이 신어보고

소리 없이 내려와

불빛 없는 집

등불

겨울밤을

감나무에 묶여 낑낑거리는 개는

앞발로 땅을 파며 김칫독처럼

운다, 울어서

등을 밀고 웅크리고 있는 개는

불씨

감나무 가지에 남은 몇 개의 이파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새처럼 개의 눈에 아른거린다

주인이 놓고 간

신발들

빈집을 녹인다

긴 겨울밤

 

 

 

 

 

 

2.jpg

 

최두석, 신발




신발 잃어버린 꿈을 꾸고 나서

새삼 살아오면서 닳아 없앤 신들과

습관처럼 자주 잃어버린 신들을 생각한다

불깡통 돌리며 쥐불 놓던 날의 먹고무신

철길 걸으며 휘파람 가다듬던 날의 운동화

최루탄 맞고 도망가다 잃어버린 구두를 떠올린다

이미 걸어온 길 때문에 가지 않은 길과

가지 않은 길 때문에 계속 걸어온 길을 되새긴다.

또한 어떻게 신발끈을 조이고

부끄럽지 않게 앞길을 가나 생각한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이없이 신을 잃고 헤매다가

어디서 남녀로 짝짝인 흰고무신 얻어 신고

어기적거리다가 꿈을 깬 날 아침에

 

 

 

 

 

 

3.jpg

 

전동균, 옛집 꿈을 꾸다




생선 굽는 냄새 진동하는

비탈진 골목, 늙은 무화과나무 아래

박수근을 닮은 낯선 남자가

등 구부린 채

풍로질을 하고 있었다


가라고, 어서 돌아가라고

겨우내 얼음빨래를 한 듯

붉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이제 곧 뒷숲에서 여우가 울 때라고

여우가, 여우가 울면

망자들은 길을 잃는다고


쾅, 대문이 닫힌 뒤

담 너머로 작은 상이 하나 넘어왔다

소금처럼 흰

고봉밥이

 

 

 

 

 

 

4.jpg

 

박남수, 몸짓




한 마리의 비둘기가

슬금슬금 밀치며 지분거린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한 마리의 비둘기를

둘레를 빙글빙글 돌며 쫓고 있다

무슨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한 마리는 알아차리고 조용히 몸을 숙이며

두 날개를 펼친다. 한 마리는

잔등 위에서 어기찬 하늘님이 되었다. 그뿐

무슨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태초는

다만 몸짓으로 열리었던 것을

 

 

 

 

 

 

5.jpg

 

송수권, 나팔꽃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 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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