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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여지껏 기다리며 살아왔다
게시물ID : lovestory_912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4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1/20 22:41:54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맹문재, 꽃




지금 네가 흘리고 있는 진땀이 비누 거품처럼 꺼지고 말겠지만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으련다


너는 사라지는 운명에 미련을 가지고 사진이나 찍어대지 않는다

떠날 때에는 그림자까지 거두어 갈 용의를

너럭바위의 표정처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절벽에 매달려 있는 조난자처럼 장맛비에 패인 언덕에서

흔들리면서도 권투 글러브를 끼는 링 위의 도전자 같은 불길을

너의 키 위로 넘긴다


그 어떤 하소연도 패악으로 간주한다고

너는 정으로 비석을 쪼듯 녹음한다

햇볕이 바뀔 때마다 네 목소리는 변색되고 말겠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믿고 있기에

너는 추억을 한 움큼 움켜쥔 바람처럼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2.jpg

 

허영선, 뿌리의 노래




깊디깊은 바윗돌 잘도 견뎌왔구나

갯메꽃, 뫼메꽃 살가운 것들 껴안고

잘도 견뎌왔구나

억세게 땅을 움켜쥔 채 늙은 뿌리는

늙은 노래를 부르며 삶을 견뎌왔으니

우린 놀랍게도 무르고 헐은 상처도 싸매며

메꽃, 달개비꽃 보드라움을 노래해 왔구나

질펀한 여름날의 해무

길 잃은 자들 위로 짙게 깔려

버둥거리며 우린 길을 찾아왔으니

막버스가 이미 지나가도 두렵지 않았던 건

삶은 이미 견딤의 시작에서

견딤의 정점으로 향한다는 의지 아니었던가


자갈은 자갈대로 한밤중 자갈자갈

섬 속에서 떠다니는 섬은 부웅부웅 소리 내며

해무가 지우는 길을 빛나게 닦는구나

들어봐라, 제주 섬 한밤을 빙빙 돌며

떠나지 못하는 뿌리의 울음

견딘 만큼 더 견디라 하지 않느냐

 

 

 

 

 

 

3.jpg

 

이달균, 평촌역에서




나는 여지껏 기다리며 살아왔다

오지 않는 기차를, 허기진 한 줄 시를

이렇듯 목만 길어진 짐승처럼 살아왔다


기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

비련의 사랑도, 피 묻은 혁명도

혼돈의 이천 년대를 열망한 적도 없었다

 

 

 

 

 

 

4.jpg

 

김두안, 의자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자처럼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흰 바람이 뽑혀 나가고


오늘은 가을이

오늘을 따라 떠나갔다


의자에는

겨울이 따사로이 앉아 있고


나는

겨울 무릎 위에 앉아 있다

 

 

 

 

 

 

5.jpg

 

박서영, 업어준다는 것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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