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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그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916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40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12 11:23:1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문정희, 자화상 부근




입에 문 파이프에서

진종일 까마귀들이 날아오르는 오후


조요로운 나무 의자 위로

노오란 죽음이 내려앉은

반 고흐의 방


창문처럼 걸려 있는 자화상 속에

삼나무들은

아름다운 고뇌를 울부짖다가

그대로 하나의 정물이 된다


날 흔들지 마

날 흔들지 마

바늘 끝에 서 있는 슬픈 눈으로


그는 내게 한 잔의 독주를 권하며

또 하나의

먼 이별을 예비시킨다

 

 

 

 

 

 

2.jpg

 

이승훈, 당신의 방




당신의 방엔

천 개의 의자와

천 개의 들판과

천 개의 벼락과 기쁨과

천 개의 태양이 있습니다

당신의 방엘 가려면

바람을 타고

가야 합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마 당신의 방엔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jpg

 

나희덕, 분홍신을 신고




음악에 몸을 맡기자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춤추는 발이

빵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공원을 지나 동사무소를 지나

당신의 식탁과 침대를 지나 무덤을 지나 풀밭을 지나

돌아오지 않아요 어쩌면 좋아요

세상은 나에게 계속 춤추라고 외쳤죠

꼬리 잘린 고양이처럼 다리를 잘린다 해도

음악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있다니

그것도 나에게 꼭 맞는 분홍신을 신고 말이에요

내 핏속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둑을 넘어가는 물소리,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이곳은 아무리 춤을 춰도 해가 지지 않아요

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들고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오래 전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 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4.jpg

 

권혁진, 프리지아꽃을 들고




살기 위해 나서는

출근길에 난

죽음을 생각한다


버스에 실려서는 내가

그대로 세상 밖으로 실려 나가길

기다린다


축 졸업 동방 유치원

재잘거리는 꼬마와 엄마들 사이에서

꽃을 팔던 젊은이

그의 손과 그 손의 프리지아를 보면서도

난 죽음을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에 임박하기 위해

그와 나는 프리지아꽃을

들고 있다


프리지아 향기처럼

조금씩 시들어

아무도 오래

여기 살아남을 자는 없다

 

 

 

 

 

 

5.jpg

 

배한봉, 그늘을 가진 사람




양파는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든다고 한다

고통의 위력은

쓸개 빠진 삶을 철들게 하고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한다

훌쩍 봄을 건너뛴 소만 한나절

양파를 뽑는 그의 손길에

툭툭, 삶도 뽑혀 수북이 쌓인다

둥글고 붉은 빛깔의

매운 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확한 생각들이 둥글게, 둥글게 굴러가는

묵시록의 양파밭

많이 헤맸던 일생을 심어도

이젠 시퍼렇게 잘 자라겠다

외로움도 매운맛이 박혀야 알뿌리가 생기고

삶도 그 외로움 품을 줄 안다

마침내 그는

그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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