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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게시물ID : lovestory_918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
조회수 : 37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5/20 22:11:42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김수영, 파밭 가에서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2.jpg

 

나희덕,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깨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3.jpg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4.jpg

 

황지우,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의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 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을 거슬러 갈 줄 안다

생후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5.jpg

 

최승호, 발효




부패해 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 왔다

묵은 관료들은 숙변을 내게 들이부었고

나는 낮은 자로서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땅에서 냄새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나는 침묵했고

그 슬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독약 먹이는 세월에 쓸개가 병든 자로서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다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오물들이 더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나는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이 내 마음의 한 변두리에 꽂혀 있다

나는 그 저수지를 가 본 적이 없다

물왕저수지로 가는 길가의 팻말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그 저수지에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 저수지에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과 진흙의 거대한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떼는 날아올라

발효하는 숨결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마음에도 전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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