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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게시물ID : lovestory_919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6/07 18:31:3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김광림, 환상통




아픈 것도

아픈 곳 나름이지만

아픈 데가 없는데

아픈 것이

기막힌 아픔이라


우리는 늘

아픔을 재며 사는가

가시에 찔린 아픔은

무릎이 까진 아픔을 따르지 못해


어느 날

피댓줄에 감겨

쇠바퀴에 으스러진


끝내

팔을 잘라내고서야

목숨을 건진 사내가

느닷없이

손가락이 아프다고 보채는데


없는 것이

있는 것마냥 아픈 것이

더 기막힌 아픔이라

 

 

 

 

 

 

2.jpg

 

최동호, 녹차 한 잔의 미소




천천히 혼자 거닐 수 있는

서늘한 앞마당 어딘가에 있었으면

조용히 떫푸른 녹차 한 잔

잔잔한 미소 띄워 영원처럼 마시고

꼬리치는 삽살개 소리나 어쩌다

찰랑이는 바람결도 외로운 귓가에 들었으면

 

 

 

 

 

 

3.jpg

 

박라연, 다시 꿈꿀 수 있다면




다시 꿈꿀 수 있다면

개미 한 마리의 손톱으로 사천 오백 날쯤

살아 낸 백송, 뚫고 들어가 살아보는 일

나무 속에 살면서

제 몸의 일부를 썩히는 일

제 혼의 일부를 베어내는 순간을 닮아보는 일

향기가 악취 되는 순간을 껴안는 일

다시 꿈꿀 수 있다면

제 것인 양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소리 낼 줄 아는 새가 되는 일

새가 되어 살면서

미처 못 간 길, 허공에 길을 내어주는 일

그 길을 또 다시 잃어버리고도

개미 한 마리로 살아 내게 하는 일

나무속에 살면서 새가 되어 살면서

축복은 신이 내리고

불운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4.jpg

 

박제천, 정암(靜菴)




벌레 울음소리가 드높은 밤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이 들수록 배운 것을 조금씩 까먹기 마련인데

언제나 아는 대로 다 말하는 병만은 버리지 못한다

꽃이 지고 새가 우는 까닭조차 헤아린 수 없어

저자거리에 숨어 한잔 술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잘난 이름 석자를 내두르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님은 다만 뜻한 바를 펼쳐 보임이다

그때 그 구름 속에 뿌리를 내렸던 난초잎을 기리며

벌레 울음소리에 장단을 맞춰보는 밤이 늘었다

 

 

 

 

 

 

5.jpg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스무 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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