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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게시물ID : lovestory_925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3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11/24 22:57:44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김남조, 허망에 관하여




내 마음을 열

열쇠 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여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 부스러기를 좀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도 하는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2.jpg

 

한강, 첫새벽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 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3.jpg

 

김영태, 과꽃




과꽃이 무슨

기억처럼 피어 있지

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

왔다가 가지

조금 울다가 가버리지

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

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었지

 

 

 

 

 

 

4.jpg

 

장철문, 갓등 아래




저 중에는 하루만 살고 가는 것들

그냥

아하, 이게 사는 거구나 하고 가는 것들

사는 게 그저

알에서 무덤으로 이사 가는 것인

그런 것들

불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지럽게 원을 그리는

도무지 뭐랄 수도 없는 것들


이 마음에는 한순간 왔다 가는 것들

너무 빨라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 몸을 알리는 것들

안팎의 경계에서

그저 잉잉거리다 마는 것들

스러진 뒤에야

그 잔상이나 남기고 가는


그마저 거두어지는

 

 

 

 

 

 

5.jpg

 

양채영, 그 나뭇가지에




내 언젠가

몸도 마음도 정결타 믿던 때에

어느 산천에 난

사려 깊은 나무 한 그루

이 마당가에 심었다

전쟁이 터지고

모든 것이 터지고

그 나무는 내게서

멀리 떠나 버렸다


싸움에도 지치고

별도 지고

이젠 남을 용서해 줄까

망설이는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친다

어느 날 마당가에 심었던

커다란 나뭇잎이었다

아직 나무에는

새가 남아 울고

그때 그 산천에서 보았던

구름 한 덩이가

그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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