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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늙은 호박을 밟은 적 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2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37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6/07 21:24:57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박제영, 매쉬멜로우




그는 특정 단어를 색깔로 구분한다

특정 단어는 냄새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는 공감각자다

가령 사랑한다는 말이 그에게 보라색으로 보이며

매쉬멜로우 향이 난다

미움이라는 단어는 붉은색이며

말똥 냄새를 풍긴다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그는 매쉬멜로우 향이 난다며 금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어느 날 여자가 붉은 옷을 입기라도 하면

말똥 냄새가 난다며 여자를 다시 미워한다

그에게 행복은 노란색이고 아카시아 향이다

슬픔은 파란색이고 민트 향이다

하루 종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있는 그를 만나더라도

놀라거나 오해하지 마시라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그냥 공감각자일 뿐이다

 

 

 

 

 

 

2.jpg

 

구현우, 설치




망가져버린 화분이 있고

간격을 두고

무너져 내리는 문법이 있다

햇빛이 너무 많거나 물이 너무 적거나

한쪽으로 쏠린 애정 때문

흩어진

화분 속의 그것은

본명과 별명을

혼용하고 있다

잘 키운 그것을 내놓고 싶었지만

다시 만든 화분은

사물이 아니다 화분의

감정에 물드는

그것은

어떤 이름에 어울리는 외형이 될까

기대와 공포가 어우러져서

방문을 잠근 뒤

먹고 자기만 한다

이 시절을

한 문장 안에 담아놓을 수 있을 때까지

 

 

 

 

 

 

3.jpg

 

서안나, 한밤의 시소




이별은 얼마나 차가운 물질인가

감정은 기우뚱거린다

당신은 높고 나는 무겁다

가볍고 무거운 우리는

연인이라는 한 팀이다


우리의 감정은

너에게로 기울었다

내게로 넘친다

지상에는 빛나서 슬픈 다리가 넷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모자를 써도

우리는 사랑의 중심에서 멀다

어떤 장르의 노래를 불러야

사적인 감정에 도착할 수 있나


짧아지거나 길어지며

우리의 감정은 완성된다


시소가

추락하듯 감정은

왜 밤에 깊어지는가

 

 

 

 

 

 

4.jpg

 

안차애, 난폭한 잠




별들의 공전주기는 길어지고 생각의 패턴은 짧아진다

자꾸 잠이 난폭해진다

셔터가 내려지듯 내일이 오늘을 수렴하지 않는다

관계의 빅뱅 때문이다


물어 뜯기듯 사납게 잠이 든다

예령도 없이 앉아서 혹은 서서도 빠지는 잠

책을 보다가 술을 마시다 키스를 하다가도 빠져드는 잠

별까지의 왕복거리가 멀어져서다

멀어지는 너와의 거리에 가위 눌린 탓이다


이제 내가 익힌 보폭으로는 네게 가 닿을 수 없다

밤 사이 더 멀어만 지는 별, 닿지 못할 종종걸음이

낯선 아침을 토해놓는다

난폭한 바람과 버스들을 풀어 놓는다

너의 공전주기에 맞춰져썬 심장의 박동주기가

자꾸 스텝을 놓쳐 부정맥이 심각하다


별들의 공전주기는 길어만 지고

너와의 만유인력 거리는 깜빡이며 점멸하는 사이

뭉텅뭉텅 물어뜯기는 잠

숭덩숭덩 썰려 나가는 하루

혼절한 꿈들이 하얗게 증발한다

 

 

 

 

 

 

5.jpg

 

백상웅, 늙은 호박을 밟은 적 있다




가끔 있다, 노력해도 이룰 수 있는 삶은 없다는 걸

인정하는 저녁이

마흔이며 쉰 너머의 한계가 보이는

늙은 호박 같은 저녁이


퇴근길에 고향 친구랑 한 십 년 만에 통화하다가

스물 넘고서부터 패배한 날들을 알린다


둘 다 부족해서 여자에게 한두 번씩은 차였다

너는 공무원 시험, 나는 신춘문예에

수 해 죽만 쑤다가

다 때려치우고 가끔 마른 넝쿨처럼 울었다


취업하고 첫 월급 받아보니 그 끝이 아찔하니

이미 그른 것 같았다

미처 따지 못하고 늙어버린 저녁이었다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계절 바뀌어 폭설에 파묻힌

얼어붙은 저녁이 와도

내가 무능해서, 인생 내가 잘못 살았다고

자책하는 날이 왔다


네 아버지 내 아버지도 그렇게 하는 수 없이

늙어갔을 텐데, 하며

수긍하는 저녁이 굴러왔다

아비들의 그런 텅 비고 주름진 저녁에 바람은 좀 불었을까


늙은 호박을 부러 밟은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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