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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어제의 식물들은 금요일을 매단 채 죽어 있다
게시물ID : lovestory_933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54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06/25 15:30:16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1.jpg

 

이정하, 봄편지




누나

올해도 어김없이 참꽃이 피었어

지난 겨울, 발목까지 눈이 내리는 날이나

세찬 바람이 불어 우리집 문풍지를 흔들 때면

동네 아이들의 함성소리는 이 언덕배기에서

날리는 연처럼 울려퍼졌지만

난 혹 참꽃이 얼어 죽지는 않을까 마음이 졸여져

남 몰래 연줄을 거두곤 했어. 하지만 누나

그저께부터 온 산에 들에 참꽃이 피어나는 걸 보면서

참꽃은 기다리면 기다리는 만큼

더욱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걸 알았어

보고 싶어하면 보고 싶어할수록

반갑다는 걸 알았어


누나

참꽃이 피면

참꽃이 피면 돌아온다는 말 벌써 잊었어?

내게 약속하며 걸던 새끼손가락의 따스한 느낌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는데

싸리문 밖을 내다보면

맨날 할 일 없는 햇살만 가득해


누나

누나가 있는 곳은 얼마나 먼 나라길래

답장도 할 수 없을까.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내 편지도 전해줄 수 없다 했을까

이 편지를

꼭꼭 접은 종이배로 만들어 시냇물에다 띄우면

누나가 받아볼 수 있을까

종이연을 만들어 하늘 높이 날려보내면

누나가 받아볼 수 있을까


누나

사람은 죽으면 다 자기가 좋아하는 꽃으로 피어난다는 거

정말이야? 그렇다면 누나는 틀림없이

참꽃으로 피어났을거다

연분홍 불빛 같은 참꽃으로 피어났을 거다


누나

어젯밤엔

참꽃을 한아름 꺾어다가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어

꿈 속에서 본 누나의 모습은

참꽃보다 더 환하고

눈이 부셨어

 

 

 

 

 

 

2.jpg

 

이성선, 장자나비




시외버스 터미널 옆길

방송국으로 오르는 골목에서

놀라 나는 발을 멈춘다

꽃 앞에 앉았던 아이가

갑자기 한 마리 나비 되어

꽃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노란 꽃 위에

푸른 바다를 내던지고

금방 그 속에서 부화되어 기어나온 듯

얼굴 붉히며

세계의 이쪽 저쪽

저 영원을

두 팔 날개를 펴고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마음을 넘어서

시간을 넘어서

꿈을 벗어버린 바다 위로

따라오라고 앞서 날며

한 마리 나비

장자가 웃는다

 

 

 

 

 

 

3.jpg

 

최은묵, 지다




무허가로 사월을 살았다

고단했던 처소는 우체통에 넣고 도시를 탐했던 발자국은 폐기한다

눈이 느려 읽지 못한 이정표는 뒤에 남은 풍경이다

뒤엣것이 크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거짓이고 싶다

허락 없이 피었으니 서명 없이 져도 괜찮겠지

바람은 어디로 가기에 가벼울까 낡은 부품을 해체하듯 목욕을 한다

뚱뚱한 마음에서 먼지의 감정을 제거하면 무승부로 기록될까

옷의 불을 끄고 잠시 야광처럼 빛나는 시간

지도에 색연필로 표시해두었던 어촌도 사월을 견뎠을지

벚꽃이 하염없이 진다,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자꾸

내 몸을 빠져 나간다

 

 

 

 

 

 

4.jpg

 

김박은경, 열광(熱狂)하는 너와 나




부를 때마다 달려가 기꺼이 몸을 열어 사랑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명랑해 의심도 질문도 없어


배가 고파 조금 핥을 때 으음 했던가, 아악 했던가

고양이가 뛰어내렸어, 죽어 떨어졌던가


목이 길어져 더는 늘어나지 못하는 스프링을 좀 봐

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머리통을 좀 봐

언제부터 꼬리로 물음표를 만들며 놀았지?

네 개의 발로 어떻게 안았을까?


믿지 못하겠어, 믿지 못하겠어?

묻지 않았어, 묻지 않았어?


검은 우산을 쓰고 돌아올 때까지 이상한 밤이야

누군가, 누군가?


고인 얼굴을 물웅덩이에 비추어보도록 아름다워

머리통을 잡아 배에 갖다 대고 따뜻해지도록 그리워


한순간도 잊지 않아

내가 너라는 걸

안녕, 안녕?

 

 

 

 

 

 

5.jpg

 

이승희, 홀연




보이지 않아도 닿을 때 있지

우리 같이 살자 응?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차를 타고

어디든 데려다 주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아직 없는 손들에게 쥐어 주는 마음 같아서

홀연하다

만져지지 않아도

지금쯤 그 골목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흔들리는 손가락의 미래들

나도 누군가의 홀연이었을까

같이 썩어가고 싶은 마음처럼

매달린 채 익어가는 별

너 때문에 살았다고

끝없이 미뤄둔 말들이 있었다고

사라진 행성이 그리운 금요일이면

없는 손의 기억으로

나는 혼자

방금 내게 닿았다가

지금 막 떠난 세계에 대해

잠시 따뜻했던 그것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린다

어제의 식물들은 금요일을 매단 채 죽어 있다

그것은

원래 내게 없던 문장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혼자 남았다는 말

점 하나가 붙잡고 있는 세계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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